교회연구(14)
제7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개최
기독교 철학자 월터스토프 박사 강연
2014년 5월 26일 기사
언더우드자매교회협의회(회장:이수영 목사)가 지난 24일과 25일 양일 간에 걸쳐 새문안교회에서 ‘개혁교회 예배의 전통과 과제: 올바른 예배를 위한 7가지 질문’을 주제로 제7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새문안교회와 뉴브런스윅신학교 주관으로 진행된 이번 심포지엄에는 기독교 철학자로 알려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박사(Nicholas Wolterstorff, 예일대 신학대학 명예교수)가 강사로 나서 개혁교회 예배의 전통과 특징을 7가지로 분석했다.
월터스토프는 “개혁교회 내에 다양한 교파들이 개혁교회가 사용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제안들과 모형들은 제공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한 적이 없다”며 “개혁교회에는 예전상의 자율성이 있다. 이것이 개혁교회 예배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 전통의 예배에는 어떤 통일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혁교회 예배의 특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개혁교회 전통에서 불변적이거나 지속적이지 않더라도 적어도 여러 변형들 기저에 있는 전형적인 구조적 패턴들을 발굴해야 한다”며 “이와 같은 특징들은 불변적인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개혁교회 예배의 상황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일단 그가 분석한 개혁교회 예배의 전통에서 나타나는 7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성도들이 찬양한다.
개혁교회 예배, 개혁교회 예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 상당수 사람들은 설교를 떠올린다. 개혁교회 예전은 곧 설교이며, 여기에다가 몇 가지 설교 전 순서들이 있고, 또한 말을 만들자면 설교 후 몇몇 순서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지금도 그 오해는 지속되고 있다.
초기 개혁교회의 회중은 찬송하는 회중이었다. 그 이후의 모든 개혁교회 회중들도 마찬가지로 찬송하는 회중들이었다. 여러 세기에 거쳐서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개혁교회 예배의 특징들 중의 하나는 회중들이 시편과 찬송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2. 성도들이 예배의식을 직접 행함으로 참여한다.
중세 말에 예전을 실행하는 것은 성직자들의 일이며, 주일예전에 평신도가 참석할 수는 있었지만 예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이 꼭 필요했고, 예전을 실행하는데 평신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평신도는 참여자가 아니라 관객이며 조용한 구경꾼이었다.
평신도는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엇인가가 자신들에게 행해질 것을, 즉 복을 받을 것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예전의 모든 행동들은 맨 앞에서 성직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평신도는 대부분의 예전 행동들을 볼 수도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교회의 주된 표지는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백성들이 동일한 예전을, 특히 동일한 성만찬을 시행하며 한 기도로, 그리고 한 제단에서 온전하고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있다”고 선언했다.
애초부터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설교는 개혁교회 예배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 왔다. 따라서 설교가 개혁교회 예배의 특징들 중의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올바른 이해다. 하지만 개혁교회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은 ‘회중찬송’이라는 사실이다. 회중찬송이 있기 때문에 개혁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단지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큰 실수다. 우리는 개혁교회 예배에 “참석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을 “실행하는데 참여한다”는 것이다.
‘실행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회중은 그들이 임명한 지도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지도 하에서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셔, 즉 행동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이다.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시작부터 소위 ‘예전적 수동성’에 대한 혐오가 깊이 자리잡고 있어 왔다.
3. 예배를 주도하는 주체는 신자들의 공식적인 기관, 즉 당회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주일예배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조직화된 지역 교회 회중이라는 공식적인 모임이다. ‘공식적인 모임’이라는 말의 의미는 개혁교회의 지역 교회는 교회 구성원들이 선출한 장로들의 모임으로 구성된 권위 및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로들의 모임, 즉 당회는 예배를 책임진다. 장로들은 회중의 권고에 따라 안수목회자를 청빙하고, 그에게 예배인도, 설교, 성례집행, 축도를 맡긴다. 그러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당회의 권위 아래에 있다.
미국기독교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매우 다른 일이 종종 발생한다. 설교자가 전적으로 혼자서 움직이면서 회중에게 예배를 제공한다. 큰 강당을 빌리고 음악가들을 찾고, 예배를 거행한다. 참석자들의 규모가 많아지면 자문위원회를 임명할수도 있지만 최종 권위는 그에게 남아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개혁교회 예배가 아니다. 그러한 설교자의 신학은 개혁교회적일 수 있지만 예전을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소집된 조직화된 지역 교회 회중의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다. 이와 같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회중의 지체로서 개혁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극에 참석하는 것과 같다. 연극의 관객은 결코 예배를 위한 공식적인 모임이 될 수 없다.
4. 일상적 삶과 예전적 축제가 서로 아우러진다.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을 성(聖)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속의 세계를 떠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위하여 모이는 것을 일상의 삶을 져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또한 거부한다.
물론, 예전의 실행에 참여하기 위해 일상의 삶을 잠시 동안 중단해야 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의 삶을 져버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과 염려를 예배에로 함께 갖고 오는 것이다.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지었던 죄들을 하나님께 고백한다. 우리에게 닥쳐진 슬픔과 비탄을 하나님께 내어놓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이르지 못한 무수한 것을 갖고 하나님께 중보기도 드린다.
이와는 반대로 예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예전에 참여함으로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질 것과 일상의 삶에서의 인도함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예배에서 성경구절과 설교말씀을 들음으로써 능력 주심과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개혁교회 예배의 이해 및 실천의 독특한 특징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예전적 예배와 매일의 일상적 삶이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 대신의 매일의 삶과 공동의 예배 사이에 쌍방향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매일의 삶이 예전의 실행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예전의 실행이 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5. 하나님이 예배의 주체로 이해된다.
‘우리의 예배’라는 책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교회 예배에 관해 논의하면서 예배를 위한 모임들을 “우리 스스로가 함께 모이는 모임”으로 묘사하면서 곧바로 덧붙여서 “모임을 하고 있는 회중은 단지 그 자체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만나는 것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신학적으로 가장 자유주의적인 진영을 제외한 모든 진영들은 카이퍼의 말에 동의한다. 즉, 우리가 예전을 실행하기 위하여 모일 때 단지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또 하나님을 만나고자 추구한다는 카이퍼의 말에 동의한다.
즉, 우리가 예전을 실행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전의 행위자이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예전의 행위자시다. 예전이 실행될 때 하나님과 회중이 상호 활동한다. 하나님은 회중이 하나님께 말할 때도 활동하신다. 회중은 ‘그들 스스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이러한 양태의 하나님 활동을 기술하기 위해 삼위일체적 언어를 전형적으로 이용해 왔다.
즉, 성자는 우리의 예배를 온전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위해 살아계신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우리가 말을 하는 대상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럴 때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곁에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이도 바로 동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6. 성령의 임하심을 구하는 기도(에피클레시스, epiklesis)는 예배의식 중에 필수요소다.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은혜의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 특히 개혁교회 전통에서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에피클레시스)는 중추적인 요소다.
에피클레시스는 성령을 부르고, 임재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임재를 기원하는 특성이 예배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초기 스위스 개혁자들이 그 당시의 로마 가톨릭 예전을 비판했던 요점들 중의 하나가 에피클레시스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받아들여진 교리는 축성시에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이었다. 사제가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임재하게 된다는 생각을 반대하는 것은 예전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개혁교회 예배의 순서에는 성령의 임하심을 명시적으로 기원하는 순서가 두 번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봉독 및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과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기 직전이다. 성경봉독과 설교 이전, 성만찬 이전의 에피클레시스는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라고 명명돼 왔다.
7. 성찬식을 매주 거행하지는 않는다.
개혁교회는 주의 만찬, 즉 성만찬을 매주 거행하지는 않는다. 깔뱅이 매주 성만찬을 집행할 것을 평생동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개혁교회 전통과 특징으로 결코 자리잡지 못했다. 사실 개혁교회 전통을 세운 이는 깔뱅만이 아니다.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이 바로 쯔빙글리다. 그는 깔뱅이 제네바에 처음 도착하기 약 10년 전에 이미 취리히에 개혁교회를 세웠다.
쯔빙글리는 1525년의 고난 주간에 그 당시까지 오래 지속됐던 예전의 형식을 파괴하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부분들을 떼어 놓아 그들을 두 개의 분리된 의식인 설교 의식과 성만찬 의식으로 만들고, 성만찬은 일 년에 네 번 행하고, 다른 모든 주일에는 설교 의식을 행하도록 정했다.
쯔빙글리의 예전은 깔뱅이 1535년에 처음 제네바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제네바에서 채택됐다. 깔뱅은 당시 쯔빙글리의 예전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성만찬의 빈도를 일 년에 네 차례에서 매주 한 차례로 늘리려는 그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제네바의 시의회는 그의 모든 청원을 거절했다.
이후 많은 개혁교회들은 16세기 초 스위스 개혁교회들이 시작했던 대로 성만찬을 일 년에 네 차례 거행하는 관행을 따르게 됐다. 쯔빙글리가 이겼고 깔뱅이 진 것이다.
개혁교회 예배 전통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월터스토프 박사는 “개혁교회 예배는 일곱 가지 특징 외에도 전통적으로 회중의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이 포함됐다. 또한 전통적으로 중보기도를 포함했다”며 “이 중보기도는 단지 개별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 나아가 인류 전체와 정부를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개혁교회 특징들을 드러내는 예배는 우리가 전해 받은 매우 귀중한 유산이며, 앞으로 지속시키고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되도록 보존해야 하는 매우 귀중한 유산”이라며 “개혁교회 예배는 때와 장소에 맞게 적응하면서 항상 신선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월터스토프 박사는 ‘성만찬’의 횟수와 관련 쯔빙글리가 논쟁에서 승리하고, 깔뱅이 진 것은 비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매주 성만찬을 주장하는 깔뱅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며, 거기에 맞게 우리의 예전들을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에서는 개혁교회 예배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며 “미국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개혁교회 예배 전통과 특징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는 개혁교회 예배의 전통들이 여전히 지금의 시대에 적절한지 고민해봐야 한다. 하지만 개혁교회예배가 지닌 특징은 소중한 유산이므로 이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방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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