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서문교회(담임:박명룡 목사), 기독교변증선교연구소(대표:박명룡 목사), 변증전도연구소(대표:안환균 목사)가 지난 11월 2일(토) 오전 10시 서문교회에서 '2024 기독교변증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콘퍼런스는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의 하나님인가?>를 주제로 5명의 강사들이 무신론 시대를 살아가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불교와 유교 등 여러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변증했다. 이날 강사들의 발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했다. (편집자 주)

종교다원주의, 왜 예수만인가?
박명룡 목사(청주서문교회 담임목사)
"예수만이 구원",
편협하고 오만한 것인가?
관용의 정신은 논리적인가?

과연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이 편협하고 오만한 생각일까?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가치는 ‘관용’이다. 관용의 사전적 의미는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관용의 의미가 오늘날에는 ‘모든 진리는 똑같다. 모든 것이 다나름대로 진리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 최고의 미덕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죄에 대한 관용이고, 유일한 악덕은 편협함이라고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의 ‘예수만이 진리’라는 주장이 독선적이고 편협한 것이라는 비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진리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비관용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연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은 편협하고 오만한 생각일까?
사실 그동안 일부 기독교인 중에는 ‘예수의 유일성’을 잘못 이해하여 극단적인 혐오행위를 간간히 자행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대 관용의 정신은 과연 논리적이고 합당한 것일까? 오늘날 관용의 정신은 비논리적이고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편협한 생각이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는 각자 배타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 각 종교는 자신의 교리가 진리라고 믿으며 핵심 교리는 타협하지 않는다. 예컨대 모슬렘은 꾸란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라고 믿는다. 불교는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의 권위를 수용하지않고, 힌두교에 대해 배타적이다.
그리고 힌두교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세 가지 교리가 있다. 그들은 업보의 법칙, 베다의 권위, 그리고 윤회 사상이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세계 주요 종교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진리라고 믿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종교들이 다 편협하고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철학자 J. P. 모어랜드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관용의 의미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비록 내 생각에 상대의 견해가 매우 잘못되었고 내가 그것에 열렬히 반대할지라도 나는 상대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즉 관용은 상대의 견해를 말할 권리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이런 진정한 관용의 정신에 의하면, 예수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는 것만으로 오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진리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유일성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그 주장은 편협한 것이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의 도전, 그리고 모순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지성인 중에는 “예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는 말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소위 ‘종교 다원주의자’라고 한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로 혹은 궁극적 실재로 가는 길이며 매개체이고 창구’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교는 똑같이 선하고 똑같은 진리를 말한다고 한다. 모든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표현 방식이 각기 다를 뿐이지 결국은 동일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한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종종 그들의 가설을 등산에 비유한다.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모두 한 정상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 종교는 모두 한 하나님이라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도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독교, 불 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어느 종교를 믿든지 결국 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전혀 편협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겉보기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종교다원주의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모든 종교가 똑같이 선하고 똑같이 진리이며 그리고 모두 옳다면, 각 종교의 핵심 교리나 종교별 진리 주장들은 서로 모순점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각 종교의 진리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불일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핵심 교리에 있어서는 상호 모순점이 존재하기까지 한다. 각 종교의 주장에는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예컨대 기독교는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으로 믿고, 은혜가 아니라 그들의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불교는 아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신론적 입장을 취한다. 힌두교는 신이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신으로 믿으며, 적어도 3억 개 이상의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가 서로 상반된 진리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진리일 수는 없다. 모든 종교가 서로 모순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논리적 선택은 두 가지이다. 그들 모두가 틀렸거나 그중 오직 한 종교만이 진짜 진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가 똑같이 선하고 진리이며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 구원관
"각 종교의 구원관은 다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구원의 길이 예수 외에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리보다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구원에 대한 개념은 대체로 한 인간이 자아 중심적 관점에서 보편적 관점을 경험하게 되는 것 또는 자기를 비우고 궁극적 실재와 일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가 다양하며 구원의 방식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부터 돌이켜서 예수님을 나의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불교의 구원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무아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성불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구원관이다. 열반은 현실 세계의 ‘나’라는 의식과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로서,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무아적 구원이요, 자신의 기억과 자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비인격적 구원을 말한다.
이러한 불교의 구원에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불교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은 절대적이다.
이슬람교는 신의 은혜보다는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고, 방법은 율법 준수이므로, 이 또한 자력 구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힌두교의 구원은 모든 자아의 욕망과 감정으로부터 초연해짐으로써 자아를 벗어나 브라만(절대자)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브라만은 비인격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궁극적 실재라고 여겨진다. 브라만 안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고, 선과 악의 구별도 없다. 결국 우주와 하나님은 하나이며,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세계의 종교들은 각 종교마다 구원에 대한 개념이 다르고 구원의 방법도 각기 다르다. 구원의 개념이 이처럼 다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구원 교리들을 억지로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 본 것에 근거할 때,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기독교의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 노릇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이렇게 하나님 없이 자신이 인생의 왕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결과가 바로 지옥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구원은 하나님을 거부하던 사람이 그의 잘못된 상태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음으로써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왕 노릇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된 복을 누릴 수 없다. 아무리 선하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인격적인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거부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고, 그 결과로 하나님 구원의 기쁨에 참여할 수 없다.
타 종교의 구원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제시 못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구원이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종교들에서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가? 사실 다른 종교에서는 그 길을 제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각 종교의 신관과 관련이 있다.
첫째,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불교는 무신론에 가깝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둘째, 힌두교는 범신론의 유형에 속한다. 범신론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이며, 우주 자체가 신이라고 믿는다. 범신론은 우주 자체가 궁극적인 존재요 신이기 때문에 우주를 만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범신론에서는 우주가 신인데 우주가 죽으면 과연 누가 우리를 구해 줄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범신론의 한계이며, 범신론을 통해 초월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이유이다.
셋째, 이슬람은 유일신을 믿고 있지만 인격적인 신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알라는 세상을 창조한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인간의 죄를 대신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또한 알라는 유일신이면서 한 인격만 가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못되며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불교,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에서는 인간이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구원의 타당성
기독교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타당한 이유가 많다.
첫째, 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많이 있다.
우주의 기원을 살펴볼 때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현대 과학에 의하면 우주의 시작이 있다. 우주의 시작은 우주 자체를 제외한 다른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시작이 있는 유한한 우주가 우주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 시작의 원인은 물질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최초 우주의 시작에는 아무런 물질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천문학 분야에 뛰어난 학자인 알렉스 빌렌킨(Alex Vilenkin)을 비롯한 유수한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無)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30) 이것은 우주의 최초 시작에는 아무런 물질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그 무엇인가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우주의 시작에는 아무런 물질이 없었다면 우주 탄생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두 가지의 논리적 선택이 있다. 하나는 숫자와 논리의 법칙과 같은 추상적 객체(abstract object)이다. 그런데 논리의 법칙이나 숫자들(1, 2, 3 … )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볼 근거가 없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인격적인 창조주가 의지를 가지고 지성적으로 우주를 설계하고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기원을 살펴볼 때, 창조주가 우주를 만들었다고 믿는 것이 가장 합당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체의 기원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우주의 생명체는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성적 존재에 의해서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는 지적설계의 명백한 증거들이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인간 세포 속에 가장 복잡한 설계도가 숨겨있다. DNA는 세포핵 안에 들어있는 설계도로서 생명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다.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 초기 세포분열 단계에서부터 DNA 안에 들어 있는 정보는 구체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정보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정보는 지성적 행위자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DNA 정보는 물질적인 특성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에서 기원할 수 없다. 정보는 생각하는 지성적인 존재에 의해서 지적으로 정교하게 고안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복잡하게 설계된 정보(DNA)는 지성적인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정교한 질서와 생명체의 지적인 특성은 지성적인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볼 때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도덕성의 기원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객관적인 도덕성이 존재한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도덕성이 있다. 이 도덕 법칙은 물질에 의해서 지배를 받을 수 없으며, 물질세계로부터 올 수도 없는 인간성의 법칙이다.
이 도덕성은 과연 어디로부터 왔겠는가? 도덕성은 도덕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즉 도덕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도덕성을 부여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 없이는 궁극적으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철학자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박사는 첫째,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들이 존재한다.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 등 세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크레이그 박사는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세상에 객관적인 도덕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분명히 도덕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사실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도덕적 가치는 그 가치들을 부여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도덕성은 그 도덕을 부여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인격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강조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맺는 구원은 기독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만약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겠는가?
하나님(God)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최고의 존재’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요, 가장 완전한 존재이다. 완벽하고 최고의 존재는 그 존재의 본질상 오직 한 분뿐이다. 최고의 존재는 둘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일신(monotheism)이다. 뿐만 아니라 그 유일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도 완전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체로서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인격적인 행위로서 관계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다른 인격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지 못하는 신은 완벽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반드시 완전해야 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이기에 오직 한 분뿐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도 완벽하게 사랑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한 분뿐이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신은 본질적으로 유일하면서도 세 인격을 가지신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면서도 세 인격을 가졌기에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본성적으로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가장 논리적으로 타당한 신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장 타당하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유일한 구세주 되심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예수의 자기주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특별한 주장을 펼친 사람은 없다.
첫째, 예수는 자신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6).
여기서 예수는 자신만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외에 그 어느 종교지도자도 자신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둘째,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밝히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이런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식하도록 하였다. 이 세상 그 어느 종교 지도자도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셋째, 예수는 자신에게 남의 죄를 사해 줄 권세가 있음을 밝힌다. 예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유대인의 사고로 볼 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예수는 그러한 신적 권위가 본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 예수는 자신이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기 위해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는다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예수는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태복음 16:27).
여섯째, 예수는 자신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일곱째, 예수는 자신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 모든 예수의 주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는 그의 신적 권위를 자기 자신에게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적인 자의식을 가졌고,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사람들의 운명이 자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렸다고 주장하고 행동하였다(요한복음 11:25).
따라서 예수님의 주장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다른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두지 않았다. 오직 예수만이 자신에게 신적인 권위를 두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훌륭한 성인으로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인격을 믿는다면 그분의 주장을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가 되신다고 주장하신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 속에 살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것은 오직 기독교 신앙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해 본다.
무신론 시대의 기쁜 소식
안환균 목사(변증전도연구소 대표)
성경의 권위가 곧 신뢰

성경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죄 없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증언한다.
이 사건의 진실성 여부는 이 특정 사실을 처음부터 ‘독점 보도’해온 성경의 권위가 믿을 만한가 아닌가로 가려진다. 권위의 신뢰성 여부가 사실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CNN이나 뉴욕타임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무엇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예언의 성취는 그 책의 권위를 확고하게 해준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오랫동안 고대해온 구원자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에 대해 그 민족의 역사책이기도 한 구약성경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고,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인류역사상 어떤 인물도 예수님처럼 한 민족의 역사 전체가 일관된 초점을 갖고 고대하며 그 인물의 탄생과 생애를 그 민족의 공적인 역사서에 세세하게 예언까지 해놓았던 경우는 없다. 그분의 동정녀 탄생이 거짓이라면, 그분의 인격과 사역과 죽음, 부활이 다 거짓이고, 그분이 역사적으로 남긴 진실한 영향력의 증거물인 기독교 역시 모두 거짓이다.
기독교 진리에는 예수라는 분의 실존과 그의 생애와 죽음,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 자체가 핵심적이다. 예수님이 정말 인류역사 속에 딱 한 번 공식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제 모든 사람은 더 이상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하나님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일차적인 ‘성탄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신론자들의 딜레마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는 못믿겠다?"
“난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는 안 믿어!” 기독교에 웬만큼 호감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분께 대한 신앙고백이 필수적이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온전한 인격적 관계 회복을 뜻한다. 그 신앙은 성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성자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으며, 성령 하나님을 내 안에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모든 종교와 사상이 오리무중 가운데 탄식하며 해답 찾기를 갈구하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해주신 구세주가 되셨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온 인류를 위한 흠 없는 속죄 제물이 되실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이라도 제거되거나 또 한 인격이라도 참 신이 아니라 천사나 사람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난다면, 그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해체시켜버리는 것은 곧 기독교 진리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이 반영된 우주만물의 구성 요소를 해체시키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씀으로 지어진 우주 만물이 그 신성을 증거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반영하는 증거물로 만들어지기도 한 우주만물의 기본 구성 요소를 해체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 예수라는 한 역사적 존재는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확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라도 무신론자들은 예수라는 분을 한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이 예수라는 한 역사적 존재와 관련해서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한 딜레마다.
지옥의 경고인가?
속죄의 기쁜 소식인가?
언젠가 불교에서 묘사하는 지옥의 광경을 읽은 적이 있다. 붉게 달궈진 쇠철판 위에 발가벗은 사람이 맨발로 서 있다. 뜨거워 한 발을 떼면 다른 한 발을 내디뎌야 하고, 발바닥을 번갈아가며 떼야만 하는 딱한 상황이 반복된다. 이런 고통을 수억조 년 이상 당해야 죗값이 갚아진다고 쓰여 있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인간의 죄악에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는 깨달음만은 분명했나 보다. 그래서 상상으로나마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런 형벌의 장소인가를 밝혀 도덕적인 교화수단으로 삼으려 한 듯싶다. 불교는 주로 장소보다는 상태의 개념으로 천국(열반)과 지옥을 그리지만, 모든 생물이 윤회하는 육도(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지옥이 자리한다고 가르쳐왔다.
고대로부터 죽은 뒤 악인을 선인과 쫙 갈라놓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상은 이슬람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힌두교에서는 영혼들이 21곳의 지옥을 거치며 환생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힌두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불교의 지옥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원시시대부터 여러 민족들의 신화에도 ‘어둡고 뜨거운 지하세계’, ‘외딴 섬’에 빗댄 지옥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옥은 죽음의 신 헤이데스가 사는 곳인데, 호머는 ‘일리아드’에서 그 곳을 ‘소름끼치는 공포에 떠는 끔찍스러운 썩은 방’이라고 묘사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인정치 않아도 지옥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산다. 양심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에서 지옥을 떠올리기는 애써 꺼린다. 가끔 할리웃 영화에서 “지옥에나 갈 녀석!” 같은 대사가 나와도 무덤덤하다. 애매하게 희화화된 종교적 용어나 욕설의 하나로 전락한 지옥만큼 우습고 가벼운 것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 켕기는 불안은 쉬 떨쳐지지 않는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만든 종교에 등장하는 지옥이 제각각 모양의 그림자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저자로 둔 성경 기독교의 지옥 경고는 단 하나의 실체 그대로다.
타종교의 지옥관은 역사적이기 보다 교훈적이다. 그러나 인류사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을 지옥행의 빌미로 지목해온 책, 유일하게도 그 지옥 권세를 깨트린 한 실존인물을 주된 테마로 삼는 성경은 지옥마저도 엄연한 역사로 소개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은 직후까지의 생애를 비디오로 찍어둔다면, 그 마지막 컷은 그가 지하 감옥에 수감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요한계시록 20:15).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범인 은닉죄’의 공범로 전락시키는 무모한 시도다. 온 우주 가운데서 티끌만한 죄 한 톨이라도 그냥 눈감아준다면, 하나님은 우주의 떳떳한 통치자가 될 자격이 없다. 우주 공간 어느 한 귀퉁이에라도 얹혀사는
한 이 엄격한 통치권의 영역에서 예외인 자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어 지억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토록 광대하신 분이 작디작은 별 지구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지구에만 인간이 있고 죄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온갖 종교적, 철학적 방황도 다 티끌만한 행성 안에서 일어난다. 피조물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직접 제시한 길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형벌 받아 마땅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되 그냥은 하실 수 없다. 성경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잠언 16:6)라고 밝힌다.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바로 그 방법이 선민 이스라엘에게 제사법으로 제시되었고, 그 제사를 완성한 분이 예수님이시다. 온전한 속죄는 세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는 피를 흘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로마서 6:23), 육체의 생명은 소화된 음식의 영양분을 온 몸에 공급하는 피에 있다. 죄인의 생명을 구하려면 속죄제물은 반드시 흘릴 피를 가진 산 짐승이어야 했다.
둘째는 대신 형벌을 받는다는 원칙이다. 죄를 지으면 원래는 당사자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짐승이 그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제사법이 허락되었다. 인간의 죄는 안수를 통해 그 짐승에게 전가된다(레위기 1:4). 이 대속제물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셋째는 완전한 제물만 용납된다는 원칙이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피 흘릴 육체를 가지되 죄 없는 온전한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교수형이나 종신형으로 죽으실 수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뚝뚝 흘리셔야 했다. 지극히 광대하신 그 하나님의 핏값이 어찌 티끌 같은 지구상 모든 인류의 죗값을 통틀어 단번에 갚지 못하겠는가!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가져가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사람의 죄는 가져가실 수가 없다. 심판과 구원은 아담 한 사람과 예수 한 사람 간의 일대일 맞거래다. 한꺼번에 ‘모든 사람’만을 거래 대상으로 삼기에 처음부터 특정인은 끼어들 틈이 없다.
첫사람 아담이 타락한 영향이 효력 있게 모든 사람 각자에게 예외 없이, 빠짐없이 다 미친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의 영향이 효력 있게 모든 사람 각자에게 예외 없이, 빠짐없이 다 미친다. 이 효력의 영향권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범한 죄의 삯인 사망을 실제로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으로 자신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한 실제적인 효력이 있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존재는 인류역사를 통틀어 그 예수라는 존재 한 분밖에 없다.
바로 이 사실이 오늘날과 같은 무신론 시대에도 기독교, 곧 예수 그리스도교만이 모든 사람 각자에게 유일하게, 그리고 유효하게 전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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