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서문교회(담임:박명룡 목사), 기독교변증선교연구소(대표:박명룡 목사), 변증전도연구소(대표:안환균 목사)가 지난 11월 2일(토) 오전 10시 서문교회에서 '2024 기독교변증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콘퍼런스는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의 하나님인가?>를 주제로 5명의 강사들이 무신론 시대를 살아가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불교와 유교 등 여러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변증했다. 이날 강사들의 발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했다. (편집자 주)
무신론 시대, 왜 하나님이 필요한가?
신국원 박사(총신대 명예교수, 웨신대 초빙교수)
신을 믿지 않는 이유
"바쁘고 무관심해서"
우리는 신에 대한 무지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간다. 신에 대한 정보가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다. 너무 바쁘거나 무관심한 탓이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신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 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신앙인들 사이에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바른 신앙과 삶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문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지 많은 지식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과 밀접하고 모든 지식의 근원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은 전투적 무신론보다 오히려 더 불행한 것이다.
무신론, 과연 골로앗일까?
물론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사실 신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유산을 통해서나 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억지스러운 반대를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무신론이라는 골리앗처럼 고도의 이론으로 겹겹이 방어막을 치고 있다.
무신론은 실제로 이론적 기초가 든든하지 않다. 무신론은 스스로의 이론적 기초에 대해 진지하게 의심해 보거나 비판적 분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대 과학이 모든 문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시하기 때문에 신적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무신론은 실존적인 결단에서부터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신론이 자기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본질이다. 자신에 대한 확증과 타자 특히 신적 존재에 대해 의존이나 책임을 지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런 무신론은 결국 창조주를 부정할 수 없게 확연히 보여주는 세상과 스스로의 이성적 본성을 거슬림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신은 생각할 수 없고 견딜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영적 진공에서 평안을 가질 수도 번영할 수도 없다.
무신론 시대,
"그래도 신(?)을 찾는다"
무신론은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 지적인 입장일 수도 있다.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반드시 그를 대체할 무엇을 찾는다. 대개 삶의 한 부분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신격화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고 소비주의는 소비를 최고 가치로 높인다.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시키며 인간도 물질 덩어리로만 본다. 뉴에이지는 영성주의로 바뀐다. 심리치료는 인간의 모든 어려움을 심리학적 문제로 보아 영적 차원을 말살한다. 절대화된 삶의 부분은 종교화된다. 뉴에이지는 영적 계몽을 구원으로 본다. 심리치료를 구원을 자처한다.
물론 신을 의식적으로 일관성 있게 배격하는 것에 주력하는 철저한 무신론이 존재한다. 이런 이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신을 알고 있어 무신론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으나 그리 효과적인 대응은 아니다. 이는 독단적이며 너무 손쉬운 비판이다.
신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 실천적 무신론과 달리 진정한 무신론은 신에 대해 진지하다. 이들은 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에 최선을 다한다. 특히 이들은 신앙인을 자처하면서도 신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에 대한 반작용에서 자신들의 지적 우위성이나 도덕적 우월성의 근거를 확보한다.
특히 실제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변증이 가장 어려울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실천적 무신론자일 수 있다. 심지어 이들은 스스로를 신앙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비판을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도 있다.
단지 신이 삶에 있어 큰 의미가 없다. 막연히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신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알지 못하는 신을 배척할 수는 없긴 하다. 이들은 애써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불필요하다고 잊고 살려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무신론은 불안을 온전히 무관심으로 덮은 종류다.
무신론은 종교적인 신앙은 물론이고 무신론에 대해서도 모두가 일치할 것을 강요하는 것에 반발한다. 따라서 “왜 하나님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여러 방향으로 답을 해야 한다. 특히 변증은 시의성과 적실성이 생명이다. 묻지도 않는 것에 대한 답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불안 증세를 가져온 무신론
무신론은 어떤 경우에나 결국 논리적이며 존재론적 공백을 메울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C. S. 루이스도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자연법을 어긴 인 간은 “불안”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분과 스스로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라고 했다.
무신론은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할 뿐이다. 무신론은 우주가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닫힌 자충족적 세계라고 여긴다. 이는 무지요 인식론적인 결함이다. 그것은 의지의 결함인 무관심이나 신을 부정하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과는 다른 종류의 무신론이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그가 창조한 세상에서 살려는 것이 현대인들이 겪는 불안의 근본원인이다. 문제는 오늘날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조차 “현대의 풍조”에 물들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급강하” 했다. 무신론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부터 먼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회복해야 한다.
세속화된 현대문화는 종교적 신앙에 대해 “회의로 가득한 시대”다. 그러나 불안하다. 무신론의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변증의 출발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에 깃들어 있는 영적 욕구를 진정 채워주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계심을 “증언”이다. 기독교 진리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이를 통해 삶의 진정한 토대를 제시하는 것이 불안한 삶의 치유와 회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와 주관적 상대주의의 세속화된 현대문화는 강력하다. 그러나 불안하다. 이 불안의 근저에 채워지지 않는 자기 진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 전도서 3:15이 말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진원지다. 그 욕구를 진정 채워주는 초월적인 삶의 진정한 토대를 제시하는 것이 회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목회자들도 왜 오늘의 인문사회학자들이 이런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위대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한 열정과 위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채우고, 참된 행복과 만족을 준다. 요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판치고 있다. 기독교인들조차 “현대의 풍조”에 물들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급강하”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 성경은 그가 세상의 창조주요, 구원자시며, 삼위일체이신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할 일은 이를 믿고 순종하며 “믿음과 예배, 기도와 찬양, 복종과 섬김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종교”요, 의미 충만한 삶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호기심 만족이나 학문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얻어질 신앙적 유익이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며 최고의 은혜다.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그분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 지식은 우리를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채워 준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그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과 그분만으로도 만족하는 삶이다. “영적 생활을 측량하는 최고의 척도는 그것이 주는 황홀경이 아니라 순종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충족성 안에서 기뻐하면서 그 분과의 교제 자체를 복으로 여긴다.
기독교는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검증할 수 있는 사실과 지식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의 해답은 하나님은 누구며, 거기 계시는 분은 누구인가로 향한다. 성경에 따르면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다.”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할 것인가?
하지만 기독교와 전혀 다른 전제에 서있는 이 시대를 향해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인가? 요한 칼빈, 코넬리우스 반틸, 쉐퍼는 불신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적 존재이기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불신자도 하나님이 만든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소통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물론 불신자는 자신의 전제에 충실할수록 실제 세계에서 멀어진다. 만약 실제 세계에 충실하면 자신의 논리에 대해 긴장을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지적 긴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원리를 거슬리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실재적 긴장이다. 이 긴장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 속에 그를 복음으로 이끌 수 있는 접촉점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반역된 삶을 사는 인생의 의미 없음의 원인을 바로 해명하고 참된 설명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를 지적 곤경으로 몰아넣어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변증은 싸워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곤경을 깨달아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쉐퍼는 이 작업을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저항하며 느끼는 긴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 놓은 지붕을 벗겨내어 실재를 직면하게 하려는 작전이라고 부른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실을 들려주어 불신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의 목적은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함이다.
티모시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 살아있는 신』의 원래 제목은 “회의로 가득한 시대의 신앙, 하나님을 믿을 이유(Reason for God)”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심과 반론에 덧붙여 기독 교 신앙에 대한 설명으로 되어 있다.
켈러는 신자와 불신자에게 두 가지를 제안한다. 불신자에게는 혹시 자신에게 검토되지 않은 맹신이 있지나 않은지 찾아보는 씨름을 해볼 것을 권한다. 신자에겐 문화가 제기하는 반론들을 심각하게 고려할 것을 부탁한다. 그 자신도 이 두 제안을 몸소 실천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즉, 첫째는 불신자의 반론을 진지하게 검토하며 대답한다. 둘째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믿어야 할 이유를 철저히 살피고 있다. 그러한 씨름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될 뿐 아니라 보다 겸손한 자세로 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한국 문화의 기반이 훨씬 종교적으로 다원적이고 기독교적 전통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도 그가 씨름했던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특히 촛불과 태극기로 대표되는 사회적 갈등 이후 더욱 그렇다. 근래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 사이에 반기독교적 정서가 확산되면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반대와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과 문화전쟁의 상황에 대한 바르고 깊이 있는 신앙적 이해가 요구된다.
좋으신 하나님을 증거하라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했다. 이는 단일 위격이라면 불가능한 속성이다. 홀로 존재하며 자신에게만 골몰한 이교의 신은 따분하고 최악의 경우 사탄처럼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호전적이다. 실제로 뉴에이지와 신이교주의, 마술숭배는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싫어한다. 이방의 신들은 자기 외 무엇을 좋아하지 않고 “어색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을 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영지주의 이단도 이런 경향을 가진다.
단일 위격으로 홀로 존재하는 신은 사랑은 물론이고 말조차 할 이유가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삼위 사이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며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다.
인간은 타락하자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얻어야 할 만족과 안식을 자기 사랑에서 찾게 되었다. 그런 세상을 구원하러 아들을 보내심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도 그를 사랑할 수 있게 하심이다.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우리를 대신해 죽을 하나님의 어린 양인 성자가 없었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를 속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을 우리가 해야 했을 것이다.”
구원은 단일 위격의 신은 결코 줄 수 없는 사랑의 구원이다.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부어진다. 그러나 은혜는 사죄에 국한되지 않는다.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역사에 기초한 것이다. 창조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교제가 너무나 즐거워 그것을 다른 존재들과 나누려는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기쁘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다. 구속 또한 그렇다.
물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달리 재난사회에서 새로운 무신론이 목소리를 높인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연적 악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답은 무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제거한다고 고통과 고난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희망이 사라질 뿐이다. 무신론적 세계관과 범신론적 세계관, 회의론과 불가지론은 자연재해를 이해하거나 대처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와 창조세계의 관계가 비틀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아울러 인간이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이 모든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고통과 고난을 체험”하셨음을 증거한다. 세상이 팬데믹으로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일을 겪는다. 고난이 의미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활을 통해 죽음과 고난을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는 “우주를 창조해 지탱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평화, 새로운 능력을 지닌 새로운 삶, 장차 고통이 없는 세계에 대한 약속”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룰 수 있음을 믿는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엄연한 진실을 상기시켜” 잠자는 심령을 깨우는 “큰 확성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재난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생의 소망을 새롭게 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엄청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목적을 이룬 셈이 된다.
무신론, 무관심의 시대
"삶으로 진리 드러내라"
변증은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지난날 변증은 주로 논리에 근거한 논증에 기초했다. 이성이 보편적이며 세계 이해도 공통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기독교 변증』(Mere Apologetics)에서 이런 경향엔 복음을 합리주의에 ‘수출’하는 대신에 이성주의를 기독교에 수입하는 위험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기독교의 합리성을 강조하다 “신비적 요소를 최소화”하거나, 신앙의 “관계적, 상상적, 실존적 측면”을 소홀히 여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성에 입각한 변증이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선 난관에 부딪쳤다. 지금은 “풍부한 상상력과 도덕적이고 심미적인 호소력”을 주목해야 한다. 정보화로 인해 쏟아지는 “사실의 소나기”에 질서를 부여해 해석해 낼 틀을 제시하는 일도 중요하다.
기독교는 인간 이성이 드러낼 수 있는 이상으로 크고 고상한 그림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단순함, 우아함, 포괄성을 갖춘 성경 이야기와 이미지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권위를 가지고 말의 한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진입로다.
철학적이며 논의를 통해서 무신론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소리를 잠재울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다. 입으로 믿고 고백하지만 열매 없는 삶에 대한 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해진다. 선교 140년을 향해 가는 한국교회에도 수준 높은 변증이 요청된다.
변증은 밖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날로 거세져 가는 불신 사상에 맞설 확신 있는 신앙적 성숙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진리가 삶의 경험들을 어떤 대안들보다 훨씬 더 잘 설명해 준다. 변증은 신앙의 변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앙인을 생각하는 이로 만들어 성숙하게 하는 일도 변증에 포함된다.
물론 “신앙 탐구자와 회의에 빠진 이”에게 복음의 강력한 비전을 보여주어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주된 임무다.
(중)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 하나님인가? (2)불교와 유교
(하)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 하나님인가? (3)종교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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