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서문교회(담임:박명룡 목사), 기독교변증선교연구소(대표:박명룡 목사), 변증전도연구소(대표:안환균 목사)가 지난 11월 2일(토) 오전 10시 서문교회에서 '2024 기독교변증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콘퍼런스는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의 하나님인가?>를 주제로 5명의 강사들이 무신론 시대를 살아가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불교와 유교 등 여러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변증했다. 이날 강사들의 발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했다. (편집자 주)
인간 붓다와 신 예수의 대화
정성민 박사(미국 LA 그레이스미션대학교 교수)
기독교와 불교의 공존
기독교와 석가의 사상은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관이다. 기독교는 유신론, 유아론, 신본주의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지닌 초월적인 세계관으로, 석가의 사상은 무신론, 무아론, 인본주의 그리고 사후세계의 부정 등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체계로서 각기 너무나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다.
신기한 것은 서로 정반대 성향의 두 종교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나는 커다란 갈등 관계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 간의 이질감과 배타적 감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의 석가의 가르침,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가?
첫째, 마음속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다.
고통은 인류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실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과 불교인들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구원이라 말하고, 불교적으로 해탈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석가는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수는 외적인 모습이나 행동들보다도 마음이나 생각을 강조했다. 즉 마음의 의지나 동기의 순수성이 행동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모든 더럽고 악한 것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시면서 인간의 마음이란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 하였다.
예수와 석가는 사람이 청결한가 청결하지 않는가의 문제는 외적인 행위나 그 어떠한 종교적인 의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선한 의도에 달렸다고 가르쳤다. 이같이 예수와 석가는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면에서 전적으로 일치한다.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탐욕 혹은 갈망이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이라는 데에도 서로 동의할 것이다. 석가는 탐욕은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였다. 성경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국에 기독교와 불교는 인간의 현주소, 즉 실존에 관하여 공통적인 면을 보인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인생을 구원하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는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고통이 따른다는 점도 공통으로 주장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아 중심적인 사고(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예수와 석가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석가의 가르침에는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진정한 나, 곧 자아(영혼)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그 자아를 삶의 중심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를 망상(Delusion) 이라고 불렀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는 영원한 자아(영혼)는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지 그 자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놓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식으로 자아에 대한 기독교와 불교의 입장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자아에 대한 이상과 목표 그리고 양식이 너무 다르다. 불교적 입장에서는 고통의 원인 혹은 뿌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욕망이고, 그 욕망의 원인은 무지이다. 반면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의 죄가 그 원인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석가는 무아의 깨우침을 통해 해탈할 것을 말하고, 예수는 각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구속할 구세주로서 예수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이처럼 기독교와 불교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자아 중심성을 한목소리로 말하지만, 자아 중심성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와 불교의 처방이나 해결 방법은 전혀 다르다. 자아 중심성에 대한 기독교적 처방은 자아로부터 죄의 짐을 제거해주는 것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와는 반대로 자아 중심성에 대한 불교적 처방은 사람들이 움켜쥘 만한 영원한 자아는 실제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결국 죄(업보)라고 하는 실체나 윤회의 실체 그리고 그 근거(영혼)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구세주로 인식되는 것이고, 석가는 해탈의 길을 가르치는 선각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둘째, 마음속의 평안은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나 마음의 평안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에서 죄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고, 마음을 바르게 잡으면 이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는 진리를 이해하고 깨우치므로 마음의 평안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에게 있어 마음의 평안이 곧 열반인 것이다.
석가는 마음의 평안을 이루면 휩쓸리지도 않고 매이지도 않으며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현실적인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도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평안을 약속하였다.
공통으로 예수와 석가는 마음의 절대적인 평안, 즉 평정심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성취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석가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감각적인 욕망을 뛰어넘어야 평정심을 얻을 수 있지만, 예수가 말하는 평안은 인간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 모두 평안을 이야기하였지만, 예수는 초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신비한 평안을 말한 것이고, 석가는 인간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에 의해 얻어지는 평정심을 말한 것이다.
깨달음으로 인한 평안과 은혜로 인한 평안의 차이는 자아(영혼)와 신의 존재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삶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석가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고,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석가는 삶에 따르는 죽음의 과정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을 자연의 이치이나 법칙으로서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이는 연기론과 무아론을 깨우친 결과이다.
바로 정해진 자연의 이치로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연한 마음이 해탈의 경험이다. 이런 석가의 입장은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 즉 영혼의 실재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우주나 자연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반면, 기독교는 삶을 죽음으로부터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는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신의 징벌의 결과이다. 바로 여기에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통해 신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다. 이는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 즉 영혼의 실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우주나 자연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긍정하는 유신론적 초월주의 세계관이다. 곧 신과 인간의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자연 혹은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은 우주의 수많은 사건 중 하나로 아주 흔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한편의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이다.
석가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죽음과 함께 육체와 영혼이 함께 그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인생무상과 무아론을 통해 초연해지거나 무심히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이다. 이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객관적 삼자로서 세상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불자가 경험할 수 있는 평정심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영원한 영혼이 인간 안에 내재하고, 그 영혼이 초월적인 영(성령)과 만날 때 일대 변혁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바로 거듭남 내지는 중생이라 하는데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관계 중심적 자아로 변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고, 인간의 영혼이 성령을 체험하면서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예수를 통한 신의 용서와 사랑이 자기 우월의식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자아를 부서트리고 새로운 영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요한복음 3:3~8) 그러므로 이 땅에서 기독교인이 체험할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은 신의 용서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또한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신과의 관계를 맺는 즐거움이나 행복을 말한다.
셋째,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삶이다.
석가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하는 삶,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특별히 성욕을 제어하는 삶을 가르쳤다. 이를 올바른 행위와 올바른 생활이라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거룩하고 청정하게 살아서 괴로움을 제거하라 하였다. 예수도 청결한 삶을 가르쳤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인간도 거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예수와 석가 모두 도덕적인 삶을 통해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행할 때에 거룩한 삶은 이뤄진다고 하셨다.
예수는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자신 스스로 병자, 가난한 자 그리고 창녀와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신을 의식하며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6)
반면, 석가가 이야기하는 도덕적인 삶은 신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거룩한 삶은 순전히 인간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무소유의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무가치하며 사라질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욕망을 제거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나’라는 정체성이 없는 것
이니 내 소유도 없는 것이고, 이에 따른 무소유의 삶은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의 공통점은 이웃을 향한 도덕적이고 선한 삶을 살며, 자신에 대해서는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석가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고자 거룩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넷째, 예수와 석가가 지향하는 삶은 무욕과 무소유이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버리고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와 석가가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고, 이에 이견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물질에서 벗어나는 양상은 차이가 있다.
예수는 물질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권한다(마 6:19~21). 이 세상을 살아가며 물질 모으는 일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먼저 현실적인 면에서 설명하기를, 물질을 쌓아 두면 좀과 동록과 도둑의 해를 입게 되어 결코 영원히 보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다음으로 정신적인 면에서 설명하기를,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하면서 물질을 쌓아 두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고 경고했다.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죄와 죽음이 따를 뿐이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6:24, 누가복음 16:13)
석가는 물질은 욕망의 대상인데, 이것에는 감각적 쾌락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감각적 쾌락은 다양하고 달콤하여 인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의 혼란은 집착을 가져오고 집착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래서 고통을 피하려면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예수와 석가 모두 물질에 마음을 두지 말며, 가족조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두 사람 모두 무욕과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물질에서 벗어나는 양상은 다르다. 석가가 무소유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집착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무소유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무소유라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무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무소유의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필요를 다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25~34)
의식주는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없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와 석가는 입을 모아서 이것에 대해 염려하거나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한다. 예수는 욕심을 버리고 무욕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석가는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탐욕에서 벗어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석가는 신에 의해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헛된 믿음이요, 없애야 할 집착으로 생각할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예수와 석가는 물욕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나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현대사회의 고질병인 탐욕과 물질 만능주의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를 원한다는 면에서 일치한다.
다섯째, 예수와 석가모니는 계급이나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추구했다.
인도의 신분이나 계급제도는 윤회사상에 근거하여 제사장 브라만이 만들어 놓은 사회질서이다. 현세에 누리고 있는 모든 특혜는 전생에 쌓아놓은 선업으로 인한 것이므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석가는 윤회사상에 회의적이었고, 그것에 근거한 업(業) 사상을 통해 만들어진 불평등한 계급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석가는 타고날 때부터 천함과 귀함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행위로 정해지는 것이라 했다. 석가는 진정한 브라만이란 특혜를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물질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세상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브라만은 출생으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신분제 안에서 최상위를 차지한 브라만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자를 브라만이라 일컬은 것이다. 신분제를 부정한 석가는 만인은 평등하다고 믿었고,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신분제나 인종차별을 부정했다. 예수는 이방인과 피가 섞인 혼혈인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예수는 우물로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요한복음 4:7~23). 그리고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민족의 반역자 세리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누가복음 19:1~10). 심지어 매춘부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마태복음 1:31~32). 그야말로 예수는 병든 자, 가난한 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과 사마리아 여인, 세리 그리고 매춘부와 같은 사회적 소외층들을 포용했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 모든 자들을 친구로 인정하고 교제했었다(요한복음15:14~15).
결과적으로 예수와 석가는 사람의 지위나 계급과는 상관이 없이 인류애를 가지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 성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가 사랑하며 인격적으로 존중하길 원했던 것이다.
여섯째, 예수와 석가모니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쳤고 또한 몸소 실천했다.
석가는 일생을 비폭력적 삶으로 일관했다. 석가가 속한 부족은 자신을 홀대한 것에 앙심을 품은 바사익 왕의 아들 유리 태자에게 학살을 당했다. 그런데 석가는 ‘나는 수미산을 이고 있는 것 같다’고 괴로움을 토로하면서도 비폭력으로 대응하였다.
예수 역시 비폭력적 삶으로 일관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칼과 뭉치로 자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무리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갔다.
여섯 가지 내용으로 볼 때, 예수와 석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마음속의 욕망 혹은 죄를 제거하여 개인적으로 평안한 삶을 누리며, 사회적으로는 서로가 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도덕적으로 청정한 세상이 되길 원했다.
이는 서로를 위해 거짓말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말이다.
단지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차이다. 즉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욕망을 제거하여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은 거의 일치한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수와 석가를 따르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며 서로 간의 대화 창구라 할 수 있다.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본질적 대화는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전지전능한 신과 그가 보낸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최우선으로 한다. 반면에 불교는 우주와 자연을 바라보며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사건에 대해 명상하므로 깨우치는 진리를 근본으로 삼는다. 이러한 극명한 차이 속에서 두 종교의 대화는 가능할까?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대화란 서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종교 간의 대화란 신의 존재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와 석가, 특히 소승불교 사이의 대화는 제외되어야 한다. 석가와 소승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아의 정체성도 부정한다. 반대로 기독교는 신의 존재가 종교 성립의 이유이다. 이 둘 사이는 대화의 토대 자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기독교와 불교가 대화를 한다면, 예수와 석가를 신적인 차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와 불교가 교리적 대화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해법은,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부처를 신격화한 유신론적 대화를 시도하든지 아니면 예수를 단순한 보통 인간으로 전락시켜 인간 부처와 인간 예수의 대화를 시도하든지 해야 한다.
문제는 대승불교가 석가의 가르침보다는 힌두교 신앙으로 복귀하여 궁극적 실재, 즉 유신론을 주장하고, 또한 불성을 주장하여 유아론적 성격을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과연 역사적으로 실존한 예수와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신격화된 부처와의 대화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대승불교가 주장하는 절대적 부처, 즉 법신과 불성의 개념은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아트만(영혼)의 개념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예수도 인간이고 석가도 인간이었는데, 궁극적 실재와의 체험을 한 후로 아주 특별한 ‘신 의식’이나 사명을 부여받아서 인류를 구원할 진리를 전파하게 되었다는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예수를 또 하나의 신격화된 부처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 기독교 신학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여래장 사상18)이며 다원주의적 결론인데, 이러한 결론이 가져오는 최종 종착지는 종교 무용론 혹은 종교 혼합주의를 바탕으로 한 단일 종교론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와 초기불교의 교리적 대화는 성립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인도주의적이고 폭넓은 사회를 위한 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상호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으로 예수와 석가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한 대화는 필요하다. 바로 연민의 마음이 인류를 향한 예수와 석가의 마음인 것이다. 여기에 유신론인가 아니면 무신론인가의 논쟁은 필요치 않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가 각 개인의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지만, 불교와의 대화에서는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한 인도주의적 대화, 구조적인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고 막으려는 사회개량을 위한 대화가 우선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기독교와 불교의 지도자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예기치 못한 사회적 재난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통해서 풀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미 경직된 형식, 현실 종교의 구조와 체제에 갇혀서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을 행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초기불교의 대화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항상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과연 우리는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가를 항상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종교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종교 간의 대화는 유신론적 종교에 한정된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하나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주제들, 즉 신의 존재, 영혼의 문제, 사후세계의 문제를 논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양극적인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석가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유신론과 무신론, 유아론과 무아론이라는 양극적 차이는 좁힐 수 없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와 불교가 이 좁힐 수 없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지구상에서 함께 생존하려면 기독교 입장에서 이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고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먼저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객관적 삼자의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대화의 숨통이 열리는 것이다.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독교가 주의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1) 기독교 신앙이 객관적인 증거로 증명된 믿음이라는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하기에 객관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은 비과학적이라고 말하고, 당신이 믿는 신앙이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고 반박을 할 때에, 그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증명할 수 있는 주관적인 증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성경의 기록이다. 둘째는 당신의 개인적인 체험이다. 즉 성경에 기록된 예수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그것이다. 물론 성령체험도 같은 맥락이다. 셋째는 예수를 믿고서 중생, 곧 거듭남을 체험한 후에 나타난 당신의 인격적인 변화이다. 이는 선하고 거룩한 삶을 수반한다.
이러한 주관적 증거들을 비신자나 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간증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가지고서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주어야 하는 법정에서 승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주관적인 체험은 신이 살아 있거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주관적인 증거 가운데, 그나마 가장 강력하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당신 삶의 극적인 변화, 즉 인격적인 변화에 관하여 현대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그리 큰 자신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인격적 변화 역시 개인적 시각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고,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 위에 근거하기에 과학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비신자와의 종교적 대화는 불가능하다.
(2) 성경에 나오는 그 모든 기적 이야기들은 현대과학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온갖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천지창조,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 태양이 멈추는 사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사건, 엘리야가 승천하는 사건, 예수의 처녀 탄생,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는 사건, 예수의 부활과 승천 등 셀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이러한 기적들이 진짜로 생겼는지 아닌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적은 신이 자연법칙(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깨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사건에 개입한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원리를 인과관계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볼 때, 기적은 결과이고, 기적의 원인은 신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무신론자들은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똑같은 기적을 보여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며, 그 기적을 체험한 증인은 당사자와 그것을 목격한 소수의 증인뿐이며, 우리 스스로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다. 신은 인간이 기적을 필요로 할 때마다 인간의 기준에 따라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신의 섭리는 항상 인간의 인지 위에 있으며 모든 주권은 신에게 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은 인간의 이해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현재 기독교인들이 체험하고 있는 기적 역시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들은 인과를 설명할 수 있는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신에 의한 신비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 기적과 체험이 비기독교인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성경 안의 기적과 현재 기독교인들이 체험하고 있는 기적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무신론자들의 입장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3) 현실 기독교의 문제들을 인식하라.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교인들은 초기 불경으로 돌아가 석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종교는 신을 숭배하거나 자신을 정화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종교가 모두 인간이 주체가 되는 활동이라는 데에 있다.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세속화와 타락의 가능성이 존재하다는 것이고, 종교를 목적으로 한 인간과 집단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포함하여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창시자의 그 신선하고 활력이 넘치는 역동적 가르침을 왜곡할 수도 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여 진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구현하며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종교가 지구상에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종교가 대화를 하려면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신이 완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이나 어리석음이 종교를 부정하거나 멸시하게 하는 것이고, 종교 창시자의 생각이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속화된 종교 집단이 그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종교가 자신의 왜곡된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대화에 임한다면, 상대 종교가 지적하는 문제점을 수용할 수 없다.
또한 종교 창시자의 본래의 가르침에 시선을 두지 않고 상대 종교의 세속화와 타락만을 문제 삼는다면 이것은 상대 종교를 공격하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는 지구상에 공존하면서 서로의 입장과 사상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조화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이며,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일일 것이다.
공자와 노자와 예수의 대화
황윤관 목사(미국 LA 작은자교회)
신앙에 지성적 접근 필요한 이유
건전한 신앙,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는 지, 정, 의, 이 세 요소의 균형이 필요하다.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것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감정에 호소하는 요소와 의지를 촉구하는 요소들은 넘쳐나는데 반해 지성적 요소들은 오히려 신앙과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쉽게 개선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첫째로, 오랜 기간 한국의 여러 교회들이 뜨거운 감정과 결단의 촉구를 통해 대형 교회로 성장했고, 이런 성공신화는 교역자들과 교인들에게 아직도 뚜렷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지성적 접근이나 변증을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둘째로, 교회가 사회 속에서 점점 게토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변화하고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의 지적인 질문이 이어져도 정해진 답변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다 보니, 이제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 도저히 대화할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혹 이런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해도 적절한 사역자가 많지 않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타종교인, 무종교인, 가나안 교인, 가톨릭교회로 옮겨 간 개신교인 등 교회 밖의 여러 사람들과 직접 대면해서 허심탄회하고 심도 있는 대화를 해 본 개신교인들이 극히 드물었다. 이런 경험이 많지 않으면 ‘역지사지'와 ‘과유불급'이라는 기독교 변증에서 주의해야 할 두 가지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다.
공자와 노자 VS 예수 그리스도
"유교를 종교로 보면 안된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 인식 달라"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던 안하던 유교와 도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인의 세계관과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동아시아 고유의 사상인 도교와 유교는 중동지역에서 발원한 아브라함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와는 물론 인도 지역의 종교(힌두교, 불교)와도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다.
사실 공자의 가르침은 현세에서 시작해서 현세에서 끝난다. 즉 현실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죽음의 문제나 초월적 세계가 아닌 현세만을 다루기 때문에 유교를 종교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자 자로가 귀신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라고 답하고 죽음에 대해서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겠느냐?”라고 답한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한다 할 수 있다. 보다 형이상학적 면이 있기는 하지만 노자 역시 이런 문제에 침묵한다. 그러나 한국의 유교는 동아시아 특유의 기사상과 결합하여 나름의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 이 한국인 고유의 생사관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무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한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은 유교와 기 사상 그리고 무교가 혼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탈속과 세속이라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자와 공자는 현세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전생이나 내생, 또는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현세에서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현생 너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 죽음 이후의 문제에 천착한 사람들은 외래 종교인 불교에서 답을 찾으려 하였다.
불교는 도가와 유가가 제시하지 못하는 현생 너머의 세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중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인격적인 창조주를 상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 사상은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상)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 하나님인가? (1)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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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서문교회(담임:박명룡 목사), 기독교변증선교연구소(대표:박명룡 목사), 변증전도연구소(대표:안환균 목사)가 지난 11월 2일(토) 오전 10시 서문교회에서 '2024 기독교변증콘퍼런스'를 개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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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무신론 시대, 왜 기독교 하나님인가? (3)종교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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