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대표)
2015년 5월 13일 기사
<케직운동의 영성> (1)
- 목차 -
I. 케직운동의 시작: 역사적 기원
II. 케직사경회
III. 케직운동의 영성
머리말
오늘날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거룩성과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다. 기독교 본래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의 대안이 1907년의 평양 대각성운동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 초창기의 영성은 큰 틀에서 청교도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청교도영성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875년 성공회 목사 하트포드-베터스비(T.D. Hartford-Battersby)가 시무한 성 요한 교회에서 개최한 이래 오늘날까지 14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케직사경회와 연결될 수 있다.
케직사경회는 성공회 목사로서 강해설교자 이반 홉킨스(Evan Henry Hopkins)가 첫 사경회의 주강사로 초빙되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성공회주교요 캠브리지 대학의 리들리 홀(Ridley Hall)의 학장 핸들리 모울(Handley Moule)은 1884년 9월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케직사경회에 참석하여 에반 홉킨스의 설교를 듣고 자기 안에 있는 죄들을 직면하고 예수를 완벽한 구속자로 받아들이고 케직운동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저명한 영국 성공회 성직자 프레벤다리 웹-펩로(the Rev. Prebendary. Webb-peploe)도 케직 운동의 가르침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케직운동은 미국의 복음주의 성결운동에도 영향을 끼쳐 미국 복음주의자 무디(D. L. Moody), 무디의 절친한 친구요 침례교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 고던(A. J. Gordon), 예일대와 예일신학부 출신인 무디성경학교 교장 토레이(R. A. Torrey), 장로교 출신의 초교파주의자요 피어슨(A. T. Pierson)도 영향을 받았고, 케직 운동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무디의 부흥운동, 특히 그가 1886년부터 시작한 대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통하여 수많은 선교사들(맥코믹신학교 학생이었던 윌리엄 베어드와 사무엘 모펫 등)을 결심하도록 만들고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토레이의 성령론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1860-1949)와 무디의 선교적 도전에 감동을 받은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전수되어,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의 평양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10년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하고 성경학교설립을 약속한 피어선(A. T. Pierson)그의 유언으로 설립된 학교가 오늘날 평택대학교의 전신 피어선성경학교)이 당시 영국에서 시작하여 미국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케직운동의 교사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피어슨 20세기 초 케직 운동의 일환으로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선교하였고 피어선성경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가 발전하여 오늘날 평택대학교가 세워졌다. 평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는 피어슨의 저서들을 번역함으로써 케직운동에 대하여 역사적 기원과 그 정신에 대하여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한국교회에도 한국복음주의 협의회를 중심으로 6년 동안(1985년-2001년) 케직사경회가 소개되고 여러 교회(할렐루야교회, 사랑의교회, 부산초량교회, 소망교회, 충현교회, 강변교회 등)에서 집회를 하였다. 이것이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시작과 더불어 된 것으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 Korean Evangelical Fellowship)는 케직 영성과 불가분적인 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65년부터 2007년 은퇴 시까지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케직사경회에서 42년간 설교하였다. 존 스토트는 20세기 하반기에 케직사경회를 대표하는 설교자로서 주강사였다. 케직사경회는 지금도 청년층부터 노년층까지 매년 여름 1만여 명이 참석하고 있는 유서 깊은 부흥운동이다. 소망교회 담임목사 김지철은 다음같이 케직사경회를 특징지운다.
“무엇보다 케직사경회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성결과 헌신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 삶의 변화, 복음전도와 선교, 제자도, 연합과 일치 등 다섯 가지 목표를 천명하고 지금도 초교파적인 말씀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입력: 2014.01.24 14:54 존 스토트의 케직사경회 설교 모은 「그리스도처럼」 (‘John Stott at Keswick’)).
I. 케직운동의 시작: 역사적 기원
1870년대 초반에 이르러 영국의 복음주의가 퇴조하였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생활수준의 향상되자 중상류층의 관심은 교회로부터 여가활동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영국교회는 이신론(deism)의 합리주의(合理主義)와 고(高)교회(high church)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쌍둥이 적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스포츠나 오락을 지원함으로써 시대적 조류에 적응하였으나 교회와 사회의 구별을 허물어뜨렸다. 복음주의자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은 세속주의에 대한 철저한 저항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하고 논쟁만 일으켰다. 이때에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이 중상류층 신자들 가운데 크게 확산된 ‘더 높은 영성’(the higher spirituality)을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18세기 초중반기에 일어난 웨슬리나 휫필드의 부흥운동은 주로 광부와 근로자들 중심의 대중들의 운동이었는 데 반하여,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케직운동은 중상류층을 지지층으로 하여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을 추구하면서 일어났다. 성공회 신학자 이반 홉킨스는 케직운동의 첫 초빙 주강사요 지도자로서 그가 편집하여 출간하였던 월간지 『신앙의 삶』(Life of Faith)을 통하여 영국교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케직운동의 교사였던 미국 선교사 피어선(Arthur T. Pierson)은 소책자 케직운동(The Keswick Movement)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1873년 영국에서 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그 운동은 개울이 끊임없이 넓어지고 점점 깊어지며 더욱 세차게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인 복음 전도자 로버트 퍼어설 스미스(Robert Pearsall Smith)와 그의 아내 한나 스미스(Hannah Withall Smith)는 둘 모두 거룩한 삶(holy life)에 관한 책과 소책자를 쓰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운동의 발단에 관여하였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신현수 역, 『케직운동』, 생명의 말씀사, 2001, 17.).
로버트 퍼어설 스미스, 영국 성공회 신학자 이반 홉킨스, 영국성공회 전문신학자요 캠브리지 대 교수 핸들리 모울(Handley C. G. Moule), 마이어(F. B. Meyer) 그리고 앤드루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와 같은 케직운동의 지도자들은 1870년대 이후 영국인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머레이는 화란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출신의 남아프리카 선교사로서 독일 뫼틀링엔(Möttlingen)의 루터교 축사(逐邪) 목회자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의 영향을 받아 현대적 의미에서의 오순절주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감리교도의 성결론에 열려 있었으며, 그의 저서들은 오순절주의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73년 영국 런던 YMCA의 정오기도 시간에 모인 여러 소집회에서 평신도 전도자인 스미스 부부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죄를 바로 물리쳐야 하는 의무와 특권”에 관하여 증언하였다. 이 모임에서 청중들은 “지속적이며 분명하며 즉각적인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지체하지 않고 입술뿐만 아니라 삶으로 확신에 찬 간증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작은 규모의 집회들이 점점 많은 참석자들로 붐비게 되었고 점차 넓은 장소에서 더 큰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0.).
그리하여 1874년에 동역자들이 새롭게 자신을 헌신하기 위한 마일드메이(Mildmay) 집회, 하노버(Hanover) 광장 집회 등 같은 2일 또는 3일 동안의 특별집회들이 있었다. 마일드메이 집회는 성공회 목사 윌리엄 페너화더(William Pennefather)가 1856년 이후 처음에는 바네트(Barnet), 그리고 1864년 런던 북쪽 마일드메이(Mildamy) 공원에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인적 성결을 주제로 해서 매년 개최한 성결운동 집회였다. 이 모임에는 그 시대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1869년에는 천 명이 운집하였다. 이러한 특별 집회는 맨처스터(Manchester), 노팅엄(Nottingham), 레스터(Leicester), 그리고 유럽 대륙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Dublin)에서도 열렸다. 이러한 집회에서의 특징은 오늘날 와그너(Peter Wagner)를 중심하여 신비로운 체험을 위주로 일어나는 신사도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소망하고 이러한 소망을 실천하는 열망이 넘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성결운동에 미국의 무디(D. L. Moody)와 그의 동료 생키(Sankey)가 영국으로 초청되어 부흥설교를 통하여 영향을 끼쳤다. 무디와 생키는 1873년 6월과 1875년 8월 사이에 영국 전역에서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무디는 윌리엄 페니화더의 초청을 받아 마일더메이에서 설교하였다. 아일랜드 부흥집회 후에 1874년 3월부터 7월까지 영국에서의 부흥집회를 위하여 미국에서 런던에 도착한 무디와 생키는 브라이턴 집회에 참석하여 설교했으며 이들의 성결운동에 의하여 감동을 받았다.
1874년 옥스퍼드의 사경회에서 한 성직자가 다음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나의 사역에서 커다란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대중들이 왔다가 갔지만, 거의 결과는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이 옳다고 믿을 수 없었으며, 나의 형제들의 일부가 소유한 영적 힘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왔다.”(Mr. Grane from Shanklin, Meeting.. at Oxford, 210). 케직운동의 전신인 옥스퍼드 집회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 옥스퍼드 집회의 참석자들은 “예배에서 능력의 비밀”을 발견했다. 피어슨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러한 집회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보다 깊은 죄와 필요에 대한 의식, 보다 풍성한 복의 기대, 기도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 있었고, 아마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향이 새롭고 놀랍게 변화되었다는 것이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0.).
이것은 보다 높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성결운동이었다. “이것은 마음의 영이 새로워지는 것, 곧 성질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죄의 마지막 본거지나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하여서 반드시 확보해야한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찾는 일,” “죄와 결핍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된 승리케 하는 힘을 새롭게 경험하는 운동”(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0-21)이 시작되었다. 죄는 지성의 눈을 가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의 줄에 얽어매며, 그 희생자들을 우상과 미신의 맷돌에 잘게 갈리게하여 마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이들 케직운동의 선구자들은 신자들과 사역자들이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실망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기도의 호흡을 할 수 있으며, 그분의 강한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승리의 삶을 추구하였다. 영국과 그 밖의 나라에서 열린 여러 집회들을 통하여 이들은 이러한 승리의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더욱더 풍성히 경험하였다. 이들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죄에 대한 승리, 마음의 순수함, 하나님과의 화목과 하나님의 평안 그리고 섬김의 능력 등을 체험하게 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2.). 수백명의 신자들이 이러한 집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려야할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1. 브로드랜드(Broadlands) 집회: 케직운동의 원형이 된 집회
1874년 7월 17일부터 23일까지 영국 캠브리지의 브로드랜드 공원에서 6일에 걸쳐 수백명이 참석하는 모임이 열렸다. 집회는 아침 7시에 시작하여 밤 11시에 끝났다. 일정은 식사 시간이 지체될 정도로 열정적으로 조용한 명상과 성경공부와 비공식적인 담화연설, 기도와 여성집회, 전체집회 등으로 이어졌다. 각 집회 중간에 작은 그룹들이 공원의 숲과 물가를 거닐거나 모여서 한 일상대화는 영적 주제가 차지했다.
참석자들은 다음같이 증언하였다. 이들은 이 집회 시간을 “일상적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에서 벗어나 며칠간 조용히 명상과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받았으며, 이 모임을 통하여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항복하는 것,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 나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능력을 물리치는 것 등과 같은 영적 삶”(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3.)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 높은 “영적 삶이 어떻게 가능하며,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증거하는지를 알고자” 하였다.
1) 숨겨진 죄를 버리는 작업
참가자들은 이 집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 이르려는 길을 찾고자 했다. 그 길은 적극적이기 보다는 소극적인 길이었다. 먼저 알고 있는 죄를 버리고자 했다. 피어슨은 브로드랜드 집회의 영적 전개를 다음같이 서술한다. “먼저 알고 있는 죄를 버렸다. 눈이 열려서 죄와 무엇이 죄인 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악이 새롭게 분별되었고, 그 흉악성과 추함이 확실히 보여졌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4.).
“의심의 여지가 있는 탐닉,”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롬 14:23)까지도 죄로 인정하고 버리게 되었다. 자신의 숨어 있는 죄를 밝히는 탐조등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 말씀을 묵살하고 설교로 듣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가로 막는 어떤 장애물로 밝혀지고, 어떤 우상도 드러나며, 또한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성령의 강력한 제한 시켰던 모든 것”이 바르게 드러나게 되었다.
2)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결단
브로드랜드 집회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자의 거룩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이라면 누구든지 그의 실재 상태가 가능한 한 그의 법적 신분에 상응하도록 진지하게 추구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높고 거룩한 부름에 합당한 거룩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러난 죄를 책하고 끊는 것뿐만 아니라 은밀한 죄를 분명히 밝히고 드러내 놓으며, 고백하고 버렸다.”
예전에는 죄에 대해 둔감했으나 이제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정당화되거나 혹은 적어도 가볍게 다루었던 것들을 이제 적극적으로 죄된 것아라고 판단하는가 하면, 기껏해야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을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죄되고 해로운 것으로 보게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5).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탐조등으로 인하여 무의시적 유보들, 곧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다스림을 받지 않은 영역을 밝히 드러내고 “보다 철저한 자기 항복의 길이 마련되었다.” 참가자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책망과 징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거룩”을 열망했으며 자신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알게되고 하나님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 “거룩한 분”으로서 알게되었다.
그리하여 이 집회에서 은혜와 복을 체험한 자들에 의하여 이 집회의 좋은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하나님과 보다 친밀하게 되는 삶의 비결”에 관하여 묻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 집회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죄와 결핍을 새롭게 의식하여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참석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규모의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풍성한 자원하는 헌금이 들어 왔다. “그 엿새 동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흘러넘쳤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때가 그들이 이제까지 경험한 가장 엄숙하고 기쁨에 찬 그리스도와의 교제기간이었다.”( 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3.)
2. 옥스퍼드 연합집회(Oxford Convention): 이전의 어떤 집회보다 높은 수준의 집회
그리하여 브로드랜드 집회에 참석하였던 아더 블랙우드 경(Sir Arthur Blackwood)이 다음 집회를 방학기간에 옥스퍼드에 열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1874년 8월 토마스 베아우챔프 경(Sir Thomas Beauchamp)은 40명의 성직자들을 그의 시골 저택이 있는 랭글리 파크( Langley Park)로 초청하여 5일 동안 집회를 하였다. 이 8월 8일에 옥스퍼드 집회의 세부사항이 마련되었다.
옥스퍼드 연합집회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배타적이고 교권적인 분위기를 가진 대학도시에서 주로 교파를 초월하여 영국과 전 유럽에서 20-30명의 대표단격인 목회자들이 모여서 평신도들과 같이 기도와 찬양, 성경공부와 대담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 가졌다.
“하나님을 더욱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형태의 개인 경건을 바라보고 조화롭게 연합을 이루었다.” 새벽기도회에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고 “성직자나 평신도들이 같은 죄와 필요들을 고백하고, 같은 복들을 달라고 기도하며, 복을 받는 똑같은 경험들을 증거하였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28). 피어슨은 옥스퍼드 집회는 이전에 있었던 다른 집회들, 미국의 만하임(Mannheim), 바인랜드(Vineland) 라운드 래이크(Round Lake), 어버린(Oberlin)에서 있었던 집회뿐만 아니라 바네트(Barnet), 마일드메이(Mildmay), 퍼드(Perth)등지에서 있었던 집회보다 더 높은 수위에 이르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집회에서 성공회 목사 하포드-배터스비(Cannon Harford-Battersby)는 “믿음의 안식”(rest of faith)을 얻었고, 다른 참가자들도 믿음의 안식을 얻기를 열망하는 것에 동감하여 “케직사경회”를 갖자고 제안하였다. 옥스퍼드 연합집회는 그 자체 스스로 불어나는 강이 되어 케직사경회의 원천이 되었고, 영국의 많은 지역과 해외의 여러 집회가 열리도록 하는 원천이 되었다. 옥스퍼드 집회에 이어 이보다 규모가 적은 집회들이 스트라우드(Stroud)에서 그룸(T. Croome)의 주관 아래 개최되었다. 스트라우드 집회에 이어 챌턴험(Cheltenham)과 브라이턴 집회가 개최되었다.
3. 브라이턴 집회(Brighton Convention): 새로운 생명부여의 집회
1875년 5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10일 동안 브라이톤 파빌리온(Pavilion)에서 개최되었다. 피어슨은 세속주의가 주의 뜰에까지 침범해 들어온 상황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형식주의가 예배를 타락시켰고, 이기주의가 영성을 마비시켰으며, 냉담함이 선교 사역을 위협하고 있었다. 영적 쇠퇴의 징후가 너무나 분명하고 경악할만한 것이어서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은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간섭해 주셔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기도하는 것에 몰두하게 되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1.). 참가자들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영적 준수”를 개최하였다.
브라이턴 집회의 참가자들이 연합기도에서 성령의 능력을 추구하는 것은 두가지 방향이었다. 하나는 “영혼의 거룩성 증대, 다른 하나는 섬김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었다. 피어슨은 다음같이 영적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집회에서 “기도와 탄원의 영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더욱 진지하고, 집요하며, 기대하고 있는 것이 되자, 어떤 새로운 영적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냉랭하고, 인습적이며, 형식에 의해 훼방과 장애를 받으며, 배타적이고 남에게 너그럽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드러나게 ‘새로운 생명’을 얻고 사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와 평안과 능력을 보다 풍부하게 경험하기에 이르렀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2.).
이 집회에서 8천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열렬하게 구하였다. 천국이 땅에 임하는 은혜가 있었다. 피어슨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의 역사에 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두러지게 나타났다. 어두움뿐만 아니라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성령은 빛으로 비추었을 뿐만 아니라 불과 같이 태웠다. 성령은 바람처럼 불어와 그곳에 모인 무리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 집회들은 일종의 하나님 임재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다.”(Arthur T. Pierson, The Keswick Movement, 『케직운동』, 31). 브라이턴 집회는 새로운 오순절 사건, 곧 전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새 영이 부여되는 영적 계절이었다. (계속)
* 위의 글은 일부 언론사에도 배포되었습니다.
[기고]케직(Keswick)운동의 영성(2) (tistory.com)
[기고]케직(Keswick)운동의 영성(3)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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