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교수, 서울신대 영익기념강좌서 종교 세력의 건국운동 다뤄
2015년 4월 1일 기사
허명섭 교수(서울신대)는 지난 4월 1일 오전 10시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해방 70주년과 한국 기독교’를 주제로 개최한 제19회 영익기념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과 종교:종교 세력의 건국운동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허명섭 박사는 “해방 후 한국의 각 종교들은 그 범주와 방식, 그리고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건국운동에 뛰어들었다”며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좌우익의 다양한 건국운동 세력들과 조우하며 각자의 노선을 취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허 박사는 “개신교가 미군정의 각 방면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국의 특혜가 아니라 새 시대에 적합한 역량을 가진 풍부한 인적 자원 때문이었다”며 “천주교가 미군정 당국에 인사들을 진출시키지 못했던 것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즉, 핵심 이념에의 충성도 중요하지만 인적 자원의 확보 없이는 이념의 적용과 실천이 공전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아래는 허 박사가 발표한 연구논문의 주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종교:종교 세력의 건국운동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한국의 종교계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첫 각료들 21명 중 약 15명이 종교인들로 구성됐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해방정국에서부터 건국정국에 이르는 장에서 한국의 종교계는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했다.
이는 1945년 12월 20일 개신교, 대종교, 불교, 천도교, 유교, 천주교 등 6대 종교가 참여해 결성한 '조선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의 행보를 통해서도 종교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탁치논쟁 정국에서 6대 종교는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주비회'와 좌익의 '민전준비위원회' 모두로부터 초청장을 받기도 했다.
민주의원 28인 의원에도 천주교(장면), 유교(김창숙), 불교(김법린), 개신교(함태영) 등이 종교계 대표로 선임됐고, 6대 종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시문에 응할 남한의 25개 단체 중에도 뽑혔다. 그리고 입법의원의 관선의원 45명에도 6대 종교 대표가 선임됐다.
이는 해방에서부터 건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군정이나 건국운동세력들이 한국의 종교계를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종교계 또한 한국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국가건설의 과정에서 비중이 있는 역할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개신교의 정치참여와 건국운동
한국 교회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수호에 앞장섰으며, 민족사적 정통성의 골조에 해당하는 3.1운동 정신의 계승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교육과 각종 문화 창달에도 지워질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 교회는 변화된 시대의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적응력과 자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호기를 맞아 한국 교회는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건국운동을 이끌었다. 조선기독교청년동맹, 기독신민회,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그리스도교연맹, 기독교민주동맹 등은 해방정국에서 결성된 기독교사회단체들로 모두 교회 재건 및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이 단체들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그리스도교연맹 중심의 우파와 기독교민주동맹 중심의 좌파(김일성 지지), 기독신민회와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중심의 중도파로 대별됐다.
해방 직후 기독교는 민주주의적 혹은 보수적 세력을 주도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당시 우파의 최대 결집체인 한국민주당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유각경, 임영신 등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도 정당 및 사회단체 결성을 주도했다. 사회민주당, 한독당, 대한국민당, 조선민족당, 신한민족당 등도 개신교인들이 주도했거나 적극 참여했던 정당들이었다.
이들 기독교 세력은 대체로 우익세력으로 자리했고, 좌익세력을 견제하며 임시정부의 절대 지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기독교계 차원의 대응이나 행동은 신중히 자제되고 있었다.
1946년에 들어와 국내외 정치세력은 크게 찬,반탁세력으로 양분됐다. 좌익세력의 찬탁운동을 민족의 '배신행위'로 규정한 기독교세력 대부분은 반탁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입장을 보였다. 반탁운동에는 기독 청년들과 학생들도 적극 참여했다. 기독교 여성들이 주도한 우익여성 단체들도 반탁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46년 중반 이후 좌우합작운동이 해방정국의 주요 사안으로 떠오르자 중간파 기독교세력이 적극 지지하며 참여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중간파는 기독신민회였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좌파 조직은 1947년 2월에 결성된 '기독교민주동맹'이다. 이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을 지지하며 '인민적 민주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후반부터 정국의 이슈가 좌우합작에서 단선단정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한국 교회는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라는 입장에서 정부수립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목표로 결성된 민족통일총본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등을 주도했다. 1947년 7월에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그리스도교연맹을 결성하고, 이승만을 지지하며 정부수립운동에 나섰다.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한국 교회는 총선거에 적극 참여했다. 이 선거에 입각해 1945년 8월 15일 정부의 출범과 함께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이로써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종교적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통한 신앙의 자유를 지향하는 사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 교인들 상당수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내각과 함께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포진하게 됐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자,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이는 미군정의 고위관리에 진출했던 개신교 신자들의 구성 비율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미군정의 행정고문 11명 중에 6명, 군정의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중 7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입법의원 90명 중 21명, 초대 제헌의원 190명 중 38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 각 종교의 정치활동과 건국운동에 대한 평가
첫째, 6대 종교의 각 집행부는 대체로 우파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는 조선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의 성명서나 활동 등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 지지와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촉구하며 조직됐고, 이후 우파의 건국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각 종교계 대표는 다수가 일제하에서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들이다.
김법린(불교), 김교준(대종교), 오상준(천도교), 이재억(유교) 등이 대표적이다. 해방정국 초기에 우파의 건국운동을 준비했던 인물들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후 탁치논쟁정국에서 그동안 첩거 관망하던 친일파들이 반공을 연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반공은 일제가 강력하게 지향했던 것이고, 해방 직후 일제가 가장 염려했던 것도 소련군이 이남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족주의 우파와 친일파의 어색한 만남과 불평한 동거가 이미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각 종교계에는 현실참여 세력들이 있었고, 각자 나름의 건국노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공간의 다양한 건국운동 세력들과 조우했고, 사안에 따라 공조와 대립 사이를 오가며 건국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천주교와 대종교를 제외한 종교들은 내부적으로 좌파와 우파로 분열돼 있었다.
중도파라 불리는 세력도 있었지만 그것은 사안에 따라 좌우파가 헤쳐 모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현실참여 세력의 이념적 성향을 고려한다면 천주교와 대종교가 우파적인 성향이 가장 강했고, 개신교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좌파적 성향이 가장 강했던 종교 세력은 천도교이며, 불교와 유교도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중도 좌파적인 성향이 강하게 형성되고 있었던 것 같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파가 대립했던 종교계는 이념적인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기도 했다. 불교가 총무원(보수)과 총본원(진본)으로, 천도교는 청우당(신파)과 보국당(구파)으로, 유교는 유도회총본부(우익)와 전국유교동맹(좌익)으로 분열됐다. 이는 그만큼 각 종교계 내의 이념적인 갈등이 컸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고 하겠다.
셋째,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이념적인 유대, 자원동원의 역량, 변화에의 적응력, 국제적인 감각 등에서 그랬다. 대한민국 건국은 궁극적으로 이승만 노선, 즉,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승리였다. 개신교는 천주교 및 대종교와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천명했던 종교 세력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천주교와 대종교의 반대는 분명 강력했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도 소수의 좌파 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나 대종교의 경우에는 개신교에 비해 인적자원이나 국제적인 감각이 풍부하지 못했다. 대종교의 건국운동은 교단 차원이 아니라 개별 차원에서 전개됐고, 그 이념적 토대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단군신앙에 근거한 국수적 민족주의였다.
천주교의 건국노선은 반공과 자유민주주의였으나 동원 가능한 자원이 절대 부족했다. 가용 인재풀이 노기남 주교와 장면 등에 집중돼 있었다. 노기남 주교는 호기를 잡았는데도 가용할 인재가 절대 부족함을 한탄할 정도였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 그리고 천도교에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좌파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상당수가 전문적인 학문적 훈련을 통해 이론과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 종교계는 상대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더구나 유교나 천도교의 우파들은 특별히 김구의 건국노선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이승만의 건국노선에 대해서는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불교는 내부적인 갈등이 심했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대처승 중심의 중앙 총무원 측과 여기에 맞서 친일불교를 척결하려는 비구승 중심의 총본원 측이 대립했다. 여기에 이념 논쟁도 가세했다.
총무원 측은 총본원 측을 좌파라 공격했고, 미군정은 비구승들을 좌파로 인식하고, 체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일부 좌파 인사들은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미군정과 총무원 측은 좌파척결이라는 공감대를 갖게 됐지만 일제 청산이라는 명제는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개신교는 가장 중요한 대한민국 건국의 세력이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반공, 사유재산권 보장, 종교의 자유 등과 같은 대한민국 건국의 성격을 고려할 때는 매우 특별했다고 하겠다.
특히 6대 종교 대부분이 우파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개신교가 미군정의 각 방면에 다수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국의 특혜가 아닌 새 시대에 적합한 역량을 가진 풍부한 인적 자원 때문에 가능했다.
천주교는 미군정에 대한 접근 능력, 반공, 자유민주주의 등 개신교와 많은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미군정 당국에 인사들을 진출시키지 못했던 것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들이 절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일반화하기에는 난점도 있지만 여타 다른 종교 세력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할 것이다. 즉, 핵심 이념에의 충성도 중요하지만 인적 자원의 확보가 없이는 이념의 적용과 실천이 공전(空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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