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목회상담학회, 가을학술대회서 신학과 심리학의 접촉점 모색
2014년 11월 23일 기사
한국목회상담학회(회장:김진영 교수, 호남신대)가 지난 11월 22일 오전 9시30분 감신대 중강당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동행, 왜 그리고 어떻게’를 주제로 2014년 가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목회상담 과정에 있어서 신학과 심리학의 접촉점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으며, 홍영택 교수(감신대)가 ‘자기초월:신학과 심리학의 접촉점’이란 제목으로 주제강연을 진행했다. 또한 △인간이해를 매개로 한 신학과 심리학의 만남:하나님 형상과 개성(김기철 교수, 배재대) △심리학의 자율성과 신학적 자신감(하재성 교수, 고려신대) △보이는 것에 눈 먼 상담사:목회상담 방법론의 시도(이희철 교수, 서울신대) △이중언어로 이루어지는 상담(홍구화 교수, 합신대) 등의 연구논문도 발표됐다. 이날 학술대회서 발표된 주요 내용을 요약해 정리했다. <편집자 주> |
# 홍영택, “심리학과 신학, 변증법적 균형 필요”
‘자기 초월’은 인간 실존의 기본 성질로서 모든 사람은 자기를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근본적 욕구를 갖고 있다. 이 욕구는 모든 특정한 욕구들의 기초를 형성한다. 사람의 삶의 진정한 실현은 자기를 끊임없이 초월하는 과정을 동반하며, 자기 초월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과의 일치다.
삶의 모든 계기들은 자기 초월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초월의 계기에는 보통 네 가지의 ‘부딪침’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 초월이 늘 원만하거나 매끄럽게 진행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파괴와 상처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네 가지 계기는 ‘자기와의 부딪침’, ‘타자와의 부딪침’, ‘세계 또는 한계와의 부딪침’, ‘궁극적 존재와의 부딪침’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자기 초월의 계기 중 심리학은 자기와의 부딪침과 타자와의 부딪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강조의 장점은 인간의 내재적 경험을 긍정하고, 그 변형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애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신학은 세계 또는 한계와의 부딪침과 궁극적 존재와의 부딪침이라는 계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의 장점은 인간의 초월적 차원을 강조하고, 궁극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며, 영성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가 지나치면 인간의 내적 경험을 무시하고 건강한 자기의 발달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기의 관점에서는 심리학이 우선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지라도 ‘나아갈 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리학을 우선시하는 것은 ‘좁음’의 오류가 될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맥락을 보지 않고, 자기의 내면의 동기와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궁극적 맥락의 관점에서는 신학이 우선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나아가는 나’는 결국 ‘궁극적 맥락’에 의해 출현하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을 우선시하는 것은 ‘넓음’의 오류가 될 것이다. 궁극적 맥락에 의한 방향과 경계를 말하면서 개별적 인격의 동기와 경험을 간과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리학과 신학의 구분이 아니라 ‘신학적 심리학’ 또는 ‘심리학적 신학’의 출현이다. 신학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 사이에는 변증법적 균형이 필요하다. 전자는 실존의 목적론적 측면을 강조하며, 후자는 실존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한다. 실존의 자기 초월은 양자 사이의 변증법적 균형을 통해 끊임없이 제3의 창조적 통합을 이루어간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자기-긍정을 강조하지만 자기의 타자를 향한 개방성을 통해 자기-초월의 측면을 보완한다. 신학에서는 실존적 한계의 받아들임을 강조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말함으로써 자기-긍정의 측면을 보완한다. 자기 초월의 각 계기마다 자기 긍정과 자기 초월의 양상은 발달적 변형을 이룬다. 어떤 경우에는 정상적인 자기 긍정은 자기 초월의 밑바탕이 되고, 정상적인 자기 초월은 자기 긍정의 맥락을 확인해준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과제는 심리적 자율성과 경험의 강조, 신학적ㆍ영성적 자기 초월의 조화에 있다. 그렇다고 신학과 심리학을 아무렇게나 합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실존적, 영적, 신학적 이해에 기반한 심리학의 재평가 및 통합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회 전통의 가장 큰 장점은 하나님의 초월적 현존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경험하는 도구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도구들은 경전으로서의 성경, 의례로서의 예배, 그리고 성령의 현존을 나누는 공동체 등이다. 교회에 참여함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향하여 부름을 경험하며, 더욱이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도록 안내, 격려, 복돋음 등을 경험할 수 있다.
초월에의 부름에 응답할 때, 성도들은 자기의 경험이 갖고 있는 한계와 왜곡을 넘어서서 새로운 ‘넓음’과 자유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그 경험 속에서 자기는 새롭게 정돈되고, 삶의 방향과 의미가 분명해지며 삶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영원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종종 교회의 초월적 부름은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초월적 부름의 도구들이 권위적 억압의 도구가 되어 자율적 경험과 초월의 과정들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체로 목회자의 권위, 전통의 권위, 성경의 권위, 예식의 권위 등이 억압적으로 작용할 때, 나타난다.
이와 같은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목회상담가는 목회상담적 관점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교회 권위주의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억압적 요소들을 드러내고, 이에 대한 건설적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교회의 권위가 진정한 치유적 및 초월적 권위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자기 긍정과 자기 초월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목회적 방법들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목회상담가는 이러한 과제를 이루기 위해 자기 긍정과 자기 초월 사이의 역동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목회신학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심리학에서 배울 것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신학으로부터도 많은 교훈들을 얻어야 할 것이다.
# 김기철, “심리학은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육체성’에 대한 인식 일깨워주는 도구”
‘목회상담’은 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목회’(목양)와 심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상담’(심리치료)에서 차용된 용어다. ‘목양의 관점’이란 인간을 위해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로 신학의 몫이고, ‘사람들의 상황’은 인간(상황)에 대한 이해로 주로 심리학의 몫이라면, ‘효율적으로 온전히 경험’하도록 돕는 일은 주로 목회신학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목회신학의 토대 위에서 구체적인 목회상담이 이루어진다.
목회상담을 잘하려면 심리학의 인간이해와 신학의 인간이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심리학의 인간이해에서 인간이란 참자기를 표출하고 개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이렇게 참자기를 마음껏 드러내는 삶을 자아실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실현은 ‘나다움’을 마음껏 펼쳐내는 개성실현에 기초해 있고, 이것이 ‘최고 버전의 자아’가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인간이해는 ‘하나님 형상으로 하나님 모양대로 거룩하게 창조된 존재’다. 기독교는 사람을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로 이해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형상이라는 인간의 속성보다는 죄성에 기초한 인간 이해가 더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이러한 자기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반면, 원지를 지닌 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더 자연스럽게 인식됐다.
따라서 신학적 인간이해는 하나님 형상보다는 원죄를 주로 인식하게 한다. 육체성이라는 한계를 지녔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 영혼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다. 이 결과로 영혼의 영역에 속하는 이성을 통해 이론적 하나님 개념은 정교하게 발전돼 왔지만 몸과 감정, 직관으로 느껴지고 표현되는 하나님 경험은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고, 전인격체인 인간 안에서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인한 혼란과 불안, 육체성의 소외를 경험하게 됐다.
결국 이성과 지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죄성에 대한 자각,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인식, 하나님 형상 교리와 원죄 교리에 대한 연구는 활성화됐지만 육체성, 정서, 감정, 직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형상 구현과 하나님 닮음의 실제, 감정이나 직관을 통한 하나님 경험에 대한 연구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렇게 고착화된 신학적 인간이해는 심리학적 인간이해와 의미 있는 만남을 갖기 힘들다. 신학적 인간 이해가 그 모드로 바꿀 때 심리학적 인간 이해와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전환은 목회신학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기능 중심의 학문인 목회신학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신학과 심리학이 만나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목회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기능 중심의 학문이고, 실용성과 효율성을 추구하고, 신학과 심리학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신학이 역동성을 지니려면 전통적인 신학방법의 모드가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 형상을 도구마나 신호로 보기보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사고의 모드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모드 전환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혹은 복음이 필요한 인간의 실존상황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로 이어진다.
성경에 등장하는 욥의 몸부림과 절규, 탕자의 고민과 방황,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제자들의 육체적 연약함, 먹기 위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던 군중,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처절함 등 육체성에서 나오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영혼으로 나아갈 수 있고, 육체성을 구현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성에 맞춰주신다. 육체성에서 나오는 욕망, 감정, 직관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통로다. 인간의 육체성이 지니는 가치와 역할을 인식하고 구현하는 일은 신학이 심리학과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루는데 필요한 신학의 모드 바꾸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만나는 것이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신학이 심리학과 만나는 일차적 목적은 인간(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 목적은 복음을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구원을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가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목회신학은 신학과 심리학 사이에 다리를 놓기에 ‘다리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과 심리학은 인간(상황) 이해라는 공동관심사를 갖고 만나 교류하며, 목회신학의 내용이 채워지고 목회상담이 이루어진다. 목회 돌봄과 상담은 인간의 육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육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지음 받았다는 확고한 자의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육체성을 활용해 하나님 형상을 드러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심리학은 우리의 육체성에 대한 인식을 일깨울 수 있다. 그리고 육체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심리학의 자원을 배우고 익히는 일은 육체성이라는 ‘하나님 형상 구현의 수단’을 갈고 닦는 일로 볼 수 있다.
# 하재성, “신학과 심리학은 독립적이고 상호비평적인 대화 지속해야”
“심리학 혹은 상담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잠식할 수 있다는 기독교 일부의 우려는 사실 현대과학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의 결과다. 심리학을 비롯한 과학은 사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탐구한 유익한 학문의 영역들이다. 그것을 탐구한 이들이 심지어 이교도라 하더라도 그 깊은 통찰력과 지혜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부인하고 거절하는 것은 그 저자인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과 같다.”
목회신학자자 상담자가 신학을 다른 사회과학에 비해 우선순위에 둔다는 것은 결코 신학이 과학을 소유하고 있거나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울러 심리학이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신학자나 기독교인이 아닌 심리학자들이 대답해야 할 몫이다.
심리학이 더욱 전문화된 현대의 다양한 학제들 가운데 과학성을 통해 스스로의 신뢰도를 높여가는 것은 심리학자들 자신의 몫이다. 그러므로 심리분석 전통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넘어 다양한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성을 만들어가는 심리학자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심리학은 인간에 대한 연구이므로 과학일 수 없다고 말하는 단순성과 순진함은 신학과 심리학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로 하여금 사회문화와 소통을 단절하게 하는 그릇된 단정이다.
심리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위축감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신학을 반드시 건전한 보수신학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자이면서 정치가였던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찍부터 과학의 발전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과학의 자율성을 신학이 인정해야 할 일반은총의 영역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과학이란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중추적인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과학이란 철학과 문학, 심지어 신학까지도 포함하는 넒은 개념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과 현상의 가장 깊은 진리를 발견해가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과학의 연구나 적용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는 ‘신실한 기독교적 참여’를 뜻하며 이는 ‘하나님의 피조된 질서의 총체성 안에서 인간 삶의 충만함을 추구함’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과학 스스로의 발전과 그리스도인들의 과학에의 참여는 교회의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카이퍼는 강조하고 있다. 카이퍼는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에 의해 우리로 하여금 창조세계의 번성에 공헌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공의 영역에 참여토록 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심리학과 과학적 자율성을 간과한 채, 임의적인 기준으로 심리학을 반기독교적인 바이러스로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에조차 무지한 극단성을 갖고 있음을 반증할 뿐이다.
물론 과학이나 심리학이 견지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환원주의적 주장이 있다면 그것까지 자율성의 이름으로 허용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현대인의 문화로서 호흡되는 심리학의 자율성을 인식하고, 비판적 대화를 통한 적극적인 참여가 실천신학의 관점에서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특히 오늘날의 편협한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세상의 모든 학문에 대해 이원론적 태도를 극복하고 있다. 칼빈은 신학이 아닌 다른 학문에 종사하거나 심지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섬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한 자들의 본래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심리학과 상담의 훈련을 받고 목회 상담에 종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 사역의 중요한 신학적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난 목회상담의 역사에서 심리학적인 인간 이상에 몰입한 과거가 있었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악이었다면 이제는 목회상담가들이 신앙 중심적인 상담의 태도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사람을 이해하고 진단하는데 있어서 정신분석학적 전문 용어들이 자신을 훨씬 탁월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용어에 몰입하고 싶은 역전이를 인식하면서 목회상담의 본질인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자원으로 자신의 상담을 이끌어가야만 한다.
심리학과 여타 과학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진단하게 하는 중요한 시각을 목회신학자들에게 제공한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한국교회가 사회적 공의의 방향을 잃고 개인과 개교회 중심적인 탐욕에 몰입하게 된 것도 결국은 자신을 진단하고 교정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지식들에 눈을 감아버린 것이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신학적 자원을 중심으로 자기비평적이고 상호비평적인 관계에서 사회과학적 자원들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는 것이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 길을 잃은 한국 교회의 생존의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회신학자들과 목회상담자들은 이 같은 신학의 자신감을 자산으로 비평적 상호주의를 기초로 회장의 삶과 그들의 처한 사회 문화적 환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신학과 사회과학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현실해석의 원리가 부재한 지금, 이들은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다원화되고 복잡화된 현대 인간 사회의 상황을 자기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타락한 인간과 사회의 구속을 위해 신학과 심리학은 독립적이고 상호비평적인 대화의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목회상담자들과 신학자들은 담대하게 심리학의 학문으로서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는 신학적 자신감 가운데,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살아 있는 인간 문서’와 그들을 에워싼 ‘살아 있는 인간 망’의 진단과 해석과 구속의 영광스러운 사명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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