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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진정 예수의 노예인가?” … ‘예수의 흔적’ 지닌 목회자 돼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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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 분당한신교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에서 자기죽음의 중요성 강조

 

2015년 7월 8일 기사

 

“우리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목회의 정신은 자기죽음의 목회다. 목회자의 자기죽음에서 시작하는 피목회의 정신이야 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오늘 조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피목회의 정신이 사라져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현실은 너무나 암담하다. 출석교인의 수가 줄어줄고 있다는 현상적 요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목회사역이 점점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죄인들의 진실한 참회를 통한 회심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거듭남’의 촉구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복음을 통해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가 되는 것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독교 사상을 외치는 설교는 점차 사라지고,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의 행복에 대한 논의가 강단에서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담임)는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김 목사는 “목회자가 복음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대한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목회를 단지 교회라는 단체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사실 목회는 목회자 스스로 복음의 교리를 경험함으로써 부패한 옛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 사람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고, 그 성화의 삶 안에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 아름답고 선하게 변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목회사역에서 이것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목회의 본질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며,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것”이라며 “새로운 시대이니 새로운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방법이 아닌 본질로 돌아가려는 목회의 정신에 의해 그 영광을 다시 찾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선조들로부터 받은 ‘자기죽음’의 목회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피목회’다. 한 사람의 목회는 그가 일생 동안 부른 토혈의 노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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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성경책의 모서리가 붉은 색으로 칠해진 이유는 성경의 진리가 많은 순교자들의 피흘림을 통해 현재까지 전해졌다는 의미였지만 오늘날 성경책의 모서리는 금박으로 도금돼 있다. 피의 정신은 사라지고 세상적인 성공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 목사는 “우리는 방종한 인간의 사상과 허무한 철학들, 만연한 물질주의와 부도덕한 사조 속에서 땅에 떨어진 복음의 영광을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며 “목회자는 그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며, 신학생들의 구도자적 몸부림은 다음 시대의 뱃머리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끊임없는 참회의 생활 안에서 자기죽음, 곧 자기 깨어짐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김 목사는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예수의 흔적이 목회자의 삶 속에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분당한신교회가 지난 7월 6일부터 8일까지 ‘자기 죽음과 살림의 목회’를 주제로 개최한 ‘故 이중표 목사 별세 10주기 기념 전국 모고히자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김남준 목사의 ‘자기죽음:자기 깨어짐’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예수의 흔적: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헬라어:스티그마타 투 예수)이란 말을 통해 우리의 구원은 할례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흔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티그마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의 문맥에서 ‘스티그마’를 해석할 경우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야 한다.

당시 노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몸에 표를 했다. 어떤 큰 가문에서는 노예들의 등에 그 가문의 불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이것을 ‘스티그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노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방지했고, 혹시 도망친 경우에는 그의 등을 벗겨 그 가문의 고유한 문장이 새겨진 흔적을 찾아 그의 신분과 소속을 입증했는데, 그 등에 새겨진 흔적을 ‘스티그마’라고 불렀다.

 

 

아무리 씻거나 지우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스티그마’는 일생동안 노예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고 있고, 또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도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로마시대의 ‘스티그마’의 문화를 배경으로 자신에게도 그러한 흔적들 ‘스티그마타’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스티그마타’ 뒤에 나오는 ‘투 예수’라는 소유격이 지시하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사도 자신의 노예 됨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처하게 된 기원과 그 분의 노예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적인 강제력을 보게 된다.

두 번째는 사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투 예수’라는 표현은 노예로 자처하며 살아가게 된 사도 바울의 원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그는 모든 서신서의 머리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노예’ 사상은 구약의 역사 속에서도 그 기초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야훼의 종’, 곧 ‘에벧 야훼’ 사상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래도록 지니던 자기인식의 전통이 바로 ‘야훼의 노예’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정체성이었고, 그것을 새로운 기독론적인 해석으로 이어받아 사도가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었던 구약의 선지자들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됐다. 하지만 율법 아래서 일했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복음을 위해 일하는 신령한 노예가 됐다.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예수의 흔적’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서 ‘스티그마’는 단수가 아니라 ‘스티그마타’라는 복수로 나온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어느 한 두 가지 장점을 닮아 간 것이 아니라 전 인격과 성품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예수를 닮아간 것을 암시한다. 노예가 되는 것은 노예의 표인 ‘스티그마’를 몸에 지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노예가 되는 것은 노예의 표인 ‘스티그마’를 몸에 지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노예로서의 본성과 기질,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노예의 길과 가치를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 노예의 ‘스티그마’는 단지 그의 외형적 신분뿐 아니라 그의 내면에 ‘노예됨’으로 가득차 있음을 암시하는 표였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한 의미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정신도 예수 노예의 정신이었고, 본성도 그 분의 노예로 살아가기에 적합하도록 전 성품이 변화됐으며, 그의 삶과 길, 가치도 예수의 그것들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가?

목회자는 단지 조직을 이끌어가는 보스나 커다란 조직의 경영주가 아니다. 목회자 직에 그런 성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아주 주변적인 것이다.

청교도 존 오웬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회자를 두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목회자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의무는 부지런한 말씀선포르 양무리들을 먹이는 것이다. … 양무리에 대한 목회자의 두 번째 의무는 그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도록 부지런히 애쓰는 것이 그들의 임무요 직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이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기도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사역자이기 전에 신자다. 따라서 목회자는 사역자로서의 삶을 훌륭하게 살아내기 전에 먼저 신자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야 한다. 신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더욱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는 것이다.

청교도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곧 ‘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헬라어: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작용은 죄의 부패성으로부터 신자의 전 본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신령한 작용인데, 이러한 성령의 작용은 진리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했던 이유도, 그 지식을 통해 거룩해질 수 있었고, 부패한 전 본성이 새로워지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

신자는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벗어버릴수록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이 이루어진다.

첫째, 신자가 거룩해지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도구는 진리다. 신자가 진리를 통해 거룩해지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기 위한 지성의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지성의 헌신을 통해 신자는 점점 더 부패한 본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한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고 아는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 분을 알아가는 지성의 헌신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다.

자신을 진리에 합치시키는 삶도 뒤따라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지식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위한 지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얻는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영혼을 밝히시고 지성을 깨우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려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하신다.

지성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진리는 그들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 안에 거룩한 은혜의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 은혜를 받지 않았더라면 행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영광으로 조명하시면서 그의 마음과 영혼의 전 본성을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에 대한 철저한 염원이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기본자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먼저 지혜에 대한 사모함, 그리고 진리와 삶을 합치 시키려는 분투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를 닮은 것은 성령으로써 거룩해진다. 신자의 부패한 본성은 성령을 통해 쇄신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간다.

성령께서는 신자 안에 진리로 역사하셔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옛 본성을 파괴하신다. 옛 본성이 갖고 있는 생명이나 기능, 혹은 작용을 잃어버리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신자의 부패한 본성은 죄의 뿌리인 자기사랑으로 나타난다.

신자는 성화되지 않은 만큼 뿌리 깊은 자기사랑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의 자기사랑은 영혼 안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성으로, 마음 안에서는 각종 육체의 정욕으로, 그리고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러한 신자의 영혼과 마음과 삶을 은혜로 감화하심으로써 죄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신다. 은혜의 감화는 신자가 지성을 통해 진리를 깨달을 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다.

성령은 또한 새 본성을 강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신다. 부패한 본성의 파괴와 새로운 본성의 형성은 죄를 죽이는 삶의 실천과 은혜를 살리는 삶의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신자의 마음과 영혼에 은혜를 강화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모습대로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에 의해 옛 본성이 파괴되는 그 곳에는 언제나 거듭난 새 성품이 형성된다.

#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하는 것

하지만 진리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들이 있다.

첫째, 욕정에 굴복된 삶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정서에 관계하고 있다. 신자가 욕정에 굴복하는 삶을 살아서는 지성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영혼이 진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사랑받을 수 없다.

신자라 할지라도 부패한 본성을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는대로 부당한 자기사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욕정에 굴복하는 삶은 자기사랑의 발로이며, 이는 인간의 정신이 진리의 빛에 사로잡힘으로써만 막을 수 있다.

신자라 할지라도 그의 지성이 만물을 다스리는 불변하는 진리의 빛으로부터 달아나고,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행동할 때에는 자신과 자신의 육체 밖에는 사랑할 수가 없다. 이것은 허위의 삶이며, 이런 삶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결핍된 삶이다.

또한 육정에 굴복된 삶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존재 질서와 가치질서를 전복한 삶으로 그릇된 사랑의 질서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존재의 질서에 따라 창조하셨고, 또 모든 만물은 그 존재의 질서를 따라 가치 질서 속에 정위된다.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욕정에 굴복한 삶은 자기사랑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질서를 전복한 삶이다.

둘째, 거짓된 표상을 좇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과 관련된 문제다.

사실 죄는 지성을 속인다. 인간 앞에 현전(現前)하는 사물이 전달해주는 표상은 거짓된 영상들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릇된 자기사랑과 욕망으로 말미암아 표상들이 주는 의미에 지성이 속임을 당함으로써 사물들의 실재를 바로 보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그래서 영혼이 어두워지고 지성이 눈멀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 이처럼 죄의 속이는 작용은 신자로 하여금 거짓 표상들에 끊임없이 속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본질이 아닌데도 거기에 생명을 거는가 하면, 본질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스스로 지혜자의 길을 버려 불행한 사람이 되어 간다.

욕망에 의해 지성이 혼란스럽게 되기도 한다. 신자의 마음이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지성은 그 작용을 심각하게 방해받는다. ‘육신의 욕망’은 곧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며, 참된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안목의 정욕’은 판단이다. 곧 진리를 인식해야 할 인간의 지성이 호기심이라는 욕망에 의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상의 자랑’은 곧 이 세상에서의 야심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유와 이성을 추구해야 할 신자의 본분을 오만으로써 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으로서는 결코 진리를 올바로 파악할 수 없으며, 항상 헛된 표상들에 속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욕망에 어두어진 지성이 표상 넘어 있는 사물의 실재를 명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지성을 속이려는 거짓 표상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 신자가 사랑에 가득찬 마음이 될 때, 그의 애성(愛性)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불붙게 되고, 의성(意性)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지성(知性)은 순수하고 명정한 상태를 유지해 거짓된 표상이 속지 않고, 진리의 빛을 통해 표상 뒤에 있는 사물의 실재를 보게 된다.

# 극복의 길: 자기 깨어짐

신자의 삶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안팎의 대적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세상도 거룩해지려는 신자의 편이 아니고, 또한 자기 안에 부패한 내면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신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거룩함에 이르기를 간구하신다.

첫째, 자기 깨어짐을 통한 회복이 있어야 한다.

자기 깨어짐은 신자 안에 있는 죄된 옛 본성으로서의 자기가 생명이나 기능, 혹은 작용을 잃어버리도록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 깨어짐은 회개의 경험 안에 있는 마음의 작용으로 영혼의 경향성에 영향을 미친다.

회개가 죄에 대해 죽어가고, 의에 대해 살아나는 과정이라면 자기 깨어짐은 죄에 대한 죽음의 실행 과정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실행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된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과정은 곧 자기 깨어짐의 과정이다. 신자는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랑하고 자기 의를 신뢰할 수 있다. 이러한 뿌리 깊은 본성이 끊임없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없다.

둘째, 자기 깨어짐의 열매가 필요하다. 신자의 자기 깨어짐은 신자의 본성, 신자의 삶, 신자의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신자의 본성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에 관한 것이다. 신자는 내재하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있는 중생한 신자의 생명의 원리를 거슬러서 살아가게 되는데, 자기 깨어짐은 그의 부패한 경향성을 파괴하고, 거룩한 경향성을 내면의 세계에 구축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작용은 신자로 하여금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다. 중생과 함께 신자 안에 심으신 생명의 원리는 죄로 말미암아 약화되며, 신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지 못한다. 자기 깨어짐을 통해 이 두 가지 일이 가능해진다.

성화는 신자의 삶도 변화시킨다.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신자의 전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깨어짐은 필연적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이 삶은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그 분을 신뢰하며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나타난다. 비록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자신에게도 행복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만들어준다.

자기 깨어짐은 또한 신자의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신자의 자기 깨어짐은 하나님을 거스르던 그 사람 안에 있는 적의를 파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자기 사랑을 버림으로써 순전한 이웃사랑에 이르게 한다.

다시 말해 부당한 자기사랑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 목적에 배향하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전향하게 함으로써 그의 존재와 삶을 창조목적에 맞게 정향해 준다.

 

* 분당한신교회(담임:이윤재 목사)는 지난 7월 6일부터 8일까지 '자기죽음과 살림의 목회'를 주제로 고 이중표 목사 별세 10주년 기념 전국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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