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찰은 성결교회의 재림론이 갖고 있는 반체제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것을 확대하려고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일본은 말세에 멸망받아야 할 반기독교 세력이며,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은 일본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황은 물러가고 그리스도가 왕 중의 왕이 되고, 이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기독교인들(새로운 이스라엘)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이들이 말하는 신천신지는 결국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성결교회를 반국가단체라는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런 주장은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누구도 이런 논리를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한일성결교회역사공동연구회가 주최하고,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관한 '제10회 한일성결교회 공동역사연구회 포럼'에 발제자로 참여한 박명수 박사(서울신대)의 주장이다.
지난 6일, 한일 양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온라인(ZOOM)으로 참여한 이번 포럼은 일본 홀리네스교단 역사편찬위원회 및 복음에의한화해위원회가 후원한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사중복음의 역사'를 주제로 진행됐다.
이날 박명수 박사는 '일제 말 광주지방법원 소송기록에 나타난 총독부의 한국성결교회의 탄압'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일제 말기 일본은 성결교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며 핍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 박사의 주된 설명을 아래에 정리했다.
일제 말, 일본의 성결교회 탄압
1.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한국인들을 전시동원체재에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리해서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한국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시에 동원하려는 것이다. 이 신사 참배는 개신교 신앙과는 매우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유일신 사상과 우상숭배 반대를 강조했다. 신사 참배는 여기에 배치되는 것이다.
2. 신사참배는 한일병합 초기부터 일본이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며, 192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가 반발을 우려해 연기했던 것을 만주사변 이후 다시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미션 스쿨을 중심으로 일본은 압박을 했지만 중일전쟁 이후에는 개신교회 자체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3. 한국교회는 감리교와 성결교회를 포함하여 대부분 일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수용하였으나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 장로교이다. 그러나 1938년 장로교 총회는 일제의 강요를 못 이기고, 신사 참배를 수용하고 말았다. 반면,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신사 참배에 반대했던 단체는 없었다.
일본, '성결교회'라는 장벽
이명직을 만나다
4.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한국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로 만들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 우선 총독부는 1943년 초부터 기독교의 여러 교파들을 하나로 묶어서 한 교단으로 만들고,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를 통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정책은 한국에서 장벽을 만났다.
5. 하나의 교단이 되려면 공동의 신조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은 독일 기독교를 따라서 구약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성결교회의 이명직은 여기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평생 성경을 가르쳐 온 이명직은 신약과 더불어 구약을 기독교의 근본 경전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이런 통합작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총독부는 성결교회의 이명직은 교단 통합에 장애가 되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6. 그래서 총독부는 방향을 바꾸어서 교단별로 일본과 한국의 교회를 묶어서 한국교회를 일본교회 통치 아래 놓으려 하였다. 그래서 1943년 5월에 장로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성결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성결교단으로 바꾸었다.
7. 감리교회는 이 문제로 진통을 겪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출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던 그룹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1945년 7월에 다시금 조선의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만들었고, 통리에는 김관식 목사를 선출하였다. 종전 직전까지 일본은 기독교를 철저하게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일제 총독부, '재림' 교리 두려워해
'재림' 강조하는 한국성결교회 폐쇄
8. 일제 말 총독부의 중요한 관심은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일본의 국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결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에 천황이 아니라 예수가 중심이 되는 천년왕국을 만든다는 재림론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장 현재 일본이 추구하고 있는 천황 중심의 대동아공영권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9. 성결교회는 재림을 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중복음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총독부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일본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10. 문제의 시작은 1942년 6월 일본에서 시작하였다. 일본은 '사상통제정책'을 발표했고, 여기에 의해서 일본성결교회의 교역자들은 일제히 검거되었다. 일본성결교회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지만 문제는 재림이었다.
11. 성결교회의 재림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천황의 신성을 모독하고, 천년왕국을 말하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기 때문에 시온주의라는 것이다.
12. 이어서 1943년 4월 7일 일본 문부성을 성결교계통의 교회에 관하여 설립인가 취소를 내렸고, 내무성은 결사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런 영향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같은 계통인 한국성결교회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지속적인 한국성결교회 탄압
13. 한국성결교회에 대한 탄압은 1943년 5월 24일, 주일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5시를 기하여 일제히 시작되어 교역자 200명, 장로, 집사 100명을 검거하였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단체들 가운데서 재림을 강조하였던 침례교(동아기독교)와 안식교도 같이 수난을 당하였다.
14. 1943년 5월 24일 검거에 이어 같은 해 9월부터는 성결교회 예배 중지령이 내려졌고, 같은 해 12월 29일에는 드디어 성결교회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해서 1917년에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성결교회는 일본에 의해서 문을 닫게 되었다.
15. 총독부는 12월 28일 한국성결교회 지도자들을 석방하였고, 29일 오전 11시 20분에 서대문에 있는 교단본부에 통리겸 총무국장 이명직, 전도국장 최석모, 교육국장 이건, 연성국장 박현명, 재무국장 최영택, 총무 겸 주사 안창기, 참여 박형순이 모여 교무회의를 열고, 이명직의 사회로 해산성명서를 가결하고 발표하였다.
16. 형식은 자진 해산이지만 내용은 총독부가 모든 것을 작성하고 이명직 목사와 간부들을 강요하여 해산하게 한 것이다. 이 해산성명서에는 일본이 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성결교회는 첫째, 영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둘째, 재림사상으로 일본의 국체를 무시했고, 셋째, 구약을 강조하여 유태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박명수 박사는 광주지방법원에 입건된 2명의 목사(이우열[京本宇栄], 정희열[政本忠義], [ ]안은 개명이름)에 대한 형사재판 1심 소송기록 자료(2010년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보존문서 원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을 복사)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일제의 성결교회 탄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과연, 성결교회 재림교리는
일본의 국채를 반대했는가?
특히 박명수 박사는 일제의 소송기록 자료에서 성결교회의 재림교리의 천년왕국설이 과연 일본의 국체를 반대하여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였는가에 중점을 두고 파악하면서 결론을 도출해냈다.
박 박사는 "성결교회의 재림교리는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순수한 비정치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이식되면서 일본의 국체명징 사상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즉, 그리스도가 지배한다고 믿는 천년왕국과 천황이 지배한다고 믿는 대동아 공영권(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아시아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정치 슬로건)은 서로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 박사는 "한국성결교회는 재림교리는 순수한 복음이라고 강조했지만 일본은 이것을 매우 정치적인 선동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일본의 국체명징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무리한 억측이
성결교회를 반국가적으로 만들어
그는 "일본의 우려에 대해 한국성결교회 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가능한 대로 일본의 현실정치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라며 "예를 들면, 재림사상이 일본의 국체와 대립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이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선동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일본 경찰이 주장하는 대로 성결교회는 반국가적인 결사단체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하지만 일본경찰은 성결교회의 재림론이 갖고 있는 반체제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것을 확대하려고 했다"라고 주장했다.
즉, 기독교인들에게 일본은 말세에 멸망받아야 할 반기독교 세력이며,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은 일본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 결국 천황은 물러가고 그리스도가 왕 중의 왕이 되고, 이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기독교인들(새로운 이스라엘)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이들이 말하는 신천신지는 결국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성결교회를 반국가단체로 여겼다는 설명이다.
박 박사는 "그러나 일본의 이런 주장은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은 누구도 이런 논리를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이명직과 성결교회,
'친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그는 "이와 같은 일본의 주장 배후에는 기독교가 미국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영미의 노예라고 보는 시각이 있었다"라며 "일본은 이런 일에 가장 앞장선 사람이 바로 이명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박 박사는 "그러나 이명직은 일본의 요구에 응해서 신사 참배를 지지하기도 했고, 성경을 서양철학이 아닌 동양의 윤리로 해석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명직은 근본적으로 영미사상의 추종자이며, 그가 주도하는 성결교회는 해산해야 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따라서 일본은 당시 성결교회와 이명직을 반일적인 단체와 인사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일제 말 이명직과 성결교회를 친일적인 단체로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평가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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