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교회들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목회자들이 거듭나기도 전에 설교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자아성찰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연약하든 강하든, 목회자와 일반 성도는 모두 자기 영혼의 상태를 늘 점검할 필요가 있다."
"청교도 신앙의 특징은 영적인 것이며 특히, 이것은 목회자 삶의 우선 순위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그라스도와의 인격적 연합, 회심하는 영혼, 죄 사함 받는 은총, 영생의 은혜, 성령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 소명으로서 거룩한 삶, 하나님 나라 추구의 순례자의 삶이다. 이 신앙 사상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변함없이 한국 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신앙의 목표다."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이 지난 10월 18일(금) 오후 3시 양재 온누리교회 화평홀에서 <리처드 백스터의 영성> 이라는 주제로 '제105회 영성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 전 김영한 박사는 개회사를 통해 "백스터가 제시한 거룩을 사모하며 생명을 다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헌신하며 자기개혁하는 참목자상은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에 요청된다"라고 강조했다.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상'
과연, 당신은 진짜 목회자인가?
먼저 발표 전 개회사를 전한 김영한 박사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인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청교도 혁명의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동료 목회자들에게 참 목자상, 거룩을 사모하며 생명을 다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헌신하는 자기개혁하는 목자상을 보여주는 등 그가 제시한 청교도 목자상은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에 요청된다."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백스터는 명저 『개혁된 목회자』(Reformed Pastors, 『참 목자상』)라는 저서에서 청교도적 참 목회자의 모습에 대하여 서술하였다"라며 "그는 당시 자신을 속이는 헛된 명목적 신앙풍조 속에서 경건의 능력과 모습을 상실하면서 사회로부터 비난을 소리를 듣는 교회를 향해 목회자의 개혁된 목회사역과신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신앙지도와 교리교육이라는 청교도 목회자 사역을 강조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백스터는 열정과 설득력있는 문체, 그리고 예리한 통찰과 비평과 경고의 메세지를 통하여 목회자들에게 호소했다"라며 "1부: 목회자의 자아성찰: 목회자의 죄를 드러냄, 2부: 목양 목회자의 마땅한 의무, 3부: 목회의 실제를 통해 백스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도 미련한 일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백스터는 지금의 교회들이 위기에 처한 이유가 이러한 목회자들이 거듭나기도 전에 설교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라 지적한다"라며 "스터는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자아성찰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연약하든 강하든, 목회자와 일반 성도는 모두 자기 영혼의 상태를 늘 점검할 필요가 있다"라고 당부했다.
목사란 누구인가?
직업으로 수행하는 목회 안돼
김 박사는 "회심 강조와 교리문답 교육은 백스터 목회의 두 가지 핵심이었다. 회심 강조는 그의 명저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한 부르심』(1658)에 잘 나타나 있다"라며 "백스터는 목사란 '영혼에 대한 사랑을 분명히 보여주고 아주 진지한 태도로 무엇이든 행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 외에 아무 것도 목표로 하는 것이 없음을 느끼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목사로서의 깊은 회심이 없고 직업으로 목사직을 수행하는 동료 목회자들에 대하여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라며 "백스터는 많은 설교자들이 청중들에게 지옥을 파하도록 극진한 관심과 열심을 갖고 백번도 넘게 경고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지금 지옥에 가 있다고 언급했다"라고 덧붙였다.
백스터의 신율법주의
김영한 박사는 "백스터는 목회 현장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칭의론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칭의를 얻기 위한 조건들로 믿음, 회개, 순종을 강화시킨 신율법주의였다"라며 "백스터는 칼빈주의를 수정해서라도 구원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행위와 지켜야 할 조건들을 강화시키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백스터는 하나님의 작정교리, 속죄, 칭의에서는 칼빈주의 입장을 따르고 있으나 속죄의 범위에 관련해서 알미니안주의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보편구원론의 개념을 개발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선택의 교리를 옹호하면서, 알미니안들과는 차별화했다"라며 "하지만 유기의 교리 거부 등 정통 칼빈주의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무엇보다 정통 칼빈주의자 오웬과 많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김 박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진리에 대한 이상(理想)이 결여되고 주관성과 사사로운 의견들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진리를 비진리로 보는 심각한 오류에 휩쓸리고 있다"라며 "이러한 시대에 목회자는 백스터가 천명하는 것처럼 기독교 공동체를 말씀에 기초하는 진리와 순결과 미덕의 공동체(영혼에 대한 사랑과 타자에 대한 섬김)로 세워나가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특히 "청교도 신앙의 특징은 영적인 것이며 특히, 이것은 목회자 삶의 우선 순위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그라스도와의 인격적 연합, 회심하는 영혼, 죄 사함 받는 은총, 영생의 은혜, 성령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 소명으로서 거룩한 삶, 하나
님 나라 추구의 순례자의 삶이다. 이 신앙 사상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변함없이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신앙의 목표다"라고 피력했다.
백스터와 오웬의 신학적 충돌
한편 이날 포럼은 이라는 주제로 김재성 박사(전 국제신대 부총장)가 <리처드 백스터의 개혁운동과 신율법주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백스터의 신학사상을 진단하고, 오웬과의 신학적 충돌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혔다.
김재성 박사는 "백스터의 신학사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 신학자로 활약한 존 오웬과 논쟁한 내용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라며 "백스터는 모두 다섯 권의 책에서, 직접적으로 오웬의 표현들이 반율법주의와 관련되어졌다고 비판했다. 오웬도 이에 대응하면서, 세 번이나 백스터에 대해서 직접 거명하여 비판과 반론을 제기했다"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백스터의 신율법주의는 구원론과 칭의론에서 당시 오웬 및 주요 청교도 신학자들과의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라며 "오웬의 안목에서 볼 때에, 점차 알미니안주의가 확산되어나가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가 희석되어지는 것이 크게 걱정되었다. 그러나 백스터가 목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곳에서는 인간의 책임성을 크게 강조하였고, 따라
서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되었다. 오웬은 칼빈주의 신학이 백스터 때문에 퇴보에 이르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에 맞서 백스터는 특히 왕정복고 이전부터, 반율법주의가 성행하는 것을 방지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물론 백스터도 반율법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반율법주의에 맞서는 방안을 강구했던 백스터는 칼빈주의를 수정해서라도 구원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행위와 지켜야 할 조건들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오웬이 보기에는 백스터의 구원론과 인간의 책임성 강화에 문제가 많았다. 오웬은 구원의 전 과정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설명했다.
백스터와 오웬의 여러 가지 신학적 충돌에 대해 설명한 김 박사는 "청교도 혁명의 절정기에 일어난 오웬과 백스터의 충돌은 끝내 타협과 화합에 이르지 못했다. 백스터는 끝까지 오웬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라며 "1660년 왕정복고 이후에, 오웬이나 백스터나 국교회의 통일된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다. 교회와 강단을 잃어버린 청교도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자들로 탄압을 받았고, 결국 1670년대 청교도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런던에서 집필에 집중하던 오웬과 백스터였으나, 둘 사이에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끝까지 이 두 사람은 죽음에 이르이까지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라며 아래와 같이 좁혀지지 않고, 합의할 수 없은 신학적 논쟁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성경은 완전한 진리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부족함 때문에 완벽한 신학과 공평한 관점과 공정한 평가를 한다는 것이 어렵다."
"청교도 혁명은 정치와 권력의 전쟁이면서도, 동시에 '신학적 전쟁'이었다. 시민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듯이, 진리의 싸움에서도 역시 심각한 상처가 발생했다. 생사 여부를 놓고서 쟁투하던 시기였기에, 청교도 신학자들도 관용과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각지대'가 있으며, 자신만의 한계와 제한성이 있게 마련이다. 저명한 신학자든지, 유명한 목회자든지, 하나님의 아는 지식을 모두 다 소유할 수는 없다 ... '사각지대' 혹은 자신이 볼 수 없는 '뒷모습'에 대해서 지적을 당할 때에, 겸손해야만 한다."
"교회에서 절대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자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서 존중하여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평가하면서, 최대한 공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관대한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적대적인 심리상태로 상대방의 신학적인 제안을 비판하거나 저울질해서는 합의된 결론을 도출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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