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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된 교회 영향력… ‘모순’과 ‘무원칙’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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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 / 박응규 교수(ACTS, 역사신학)

 

“한국장로교회는 비교적 초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므로 개화에 앞장서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으로 조선왕조 말기와 일제치하에서 인내하며 강점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되는 등 국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박응규 교수는 “또한 해방과 더불어 불어 닥친 남북의 분단 상황와 이념 갈등 속에서 통일된 교회와 조국을 세우기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남한만이라도 기독교 정신과 가치를 토대로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초석을 닦는데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제적 근대화와 함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한국장로교회는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져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감당한데 비판적인 요인이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며 “최근 들어 총선이나 대선 등의 선거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지나친 정치참여는 교회의 본질을 숙고하지 않은 채,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후원하는 교회나 교회연합 조직체의 이름으로 교계 및 일반 언론에 자주 게재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는 국민 전반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국가에 기여하며 현실 참여의식을 소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정부나 정치권력에 유착하려는 자세나 또는 정치와 무관하려는 초월이나 도피의 자세도 지양해야 한다”며 “특히 장로교회는 국가권력이 절대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상대화 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성경의 진리와 기독교 전통에서 영원불변한 것을 현실 사회에서 살리고, 더욱 빛나도록 애써야 할 것이지, 상황의 변천에 부응해 그 진리를 왜곡 해석하거나 수정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한국장로교회의 제도와 기능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위해 수시로 갱신되고 개혁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국가에 대한 영향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로 드러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연구목차는 다음과 같다.

여는 말
Ⅰ. 조선왕조 말기 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
1. 개화와 한국장로교회
2. 성경번역 및 보급과 성경공부를 통한 민족과 국가의식 강화
3.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국가관과 구국기도회 운동
Ⅱ. 일제 강점기 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1910~1945)
1. 한국장로교회와 105인 사건
2. 한국장로교회와 3.1 독립운동
3. 한국장로교회와 신사참배 반대운동
Ⅲ. 광복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1945~1961)
1. 광복직후 남북한 교회의 정치참여
2.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장로교회
3. 6.25 동란과 한국장로교회
Ⅳ. 근대화/민주화 시기 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1961~1987)
닫는 말

 

 

# 연구내용 중에서

1. 국운이 점점 약화됐던 1890년대 한국 교회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의 열정을 소유하게 됐고, 애국, 충군적 집회활동이나 사회단체 결성과 참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교육과 개회가 밀접한 관계이듯이 교육과 교회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놓였던 것이며, 기독교회가 흥왕할수록 교육과 개화, 나아가는 국가도 흥왕한다는 논리에 귀착됐다. 결국 교육의 강조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밀접한 동반자로 정립하게 했다.

 

2. 1919년 독립운동에도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많은 장로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일제에 의한 합방이 다가온 것을 인식한 길선주는 장로교 공의회에 구국기도회를 제안했다. 일허한 신앙적 특징이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의 대표로서 독입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면서 겨레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는 구국신앙과 독립우농이 연계돼 있었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가치체계와 국민의 사상개혁을 이룩하고, 서구 기독교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를 수용해 제도적인 갱신을 이룩하며, 공명정대한 국제협약과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대외적인 독립보존을 이룩한다는 신념이었다.

 

3.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국장로교회가 민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일제에 항거한 것은 교회사와 민족의 역사 앞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타협 업이 증거하고 교회와 국가에 대한 신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것이 신자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에게도 하나님 앞에서의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어서 진리를 타협 없이 증거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4. 해방 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제잔재 청산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의 건국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세력이 강했던 북한에서는 해방과 함께 장로교 목사들을 중심으로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질서를 수립하려고 부단히 시도했다. 하지만 공상장 정권으로 인해 교회는 탄압받았다. 북한의 장로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정권에 대항해 교회의 본질과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통일된 조국에 대한 염원을 위해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5. 남한의 기독교는 해방 직후부터 특권을 누리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특히 미군정은 개신교회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자유를 부여했다. 이런 가운데 남한교회의 정치참여는 기독신자인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거교단적인 활동을 했다. 이러한 배후에는 기독정치인의 정치철학이나 신앙적 입장을 면밀하게 판단하고 행동하기보다는 기독교인 정치인이라는 우호적인 선입견이 작용한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6. 해방 직후, 한국장로교회 지도자들이 품었던 통일된 조국과 교회에 대한 염원과 기독교적 정신적 가치에 근거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고 했던 노력들은 높이 평가할만 하지만 그러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갖추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방법도 강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 6.25 동란 이후 한국 교계는 거의 모든 교단들이 교권분쟁과 비신학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교단분열의 아픔에 시달렸고, 동란의 참변 속에서 민족과 사회 앞에 그 본질적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이러한 자체 내의 문제와 함께 자유당 정권의 권력남용과 연장을 위한 온갖 반 민주주의적 작태를 방치하고, 비판적인 정치 참여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렇듯 정부로서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독재정권의 변호거리로 삼았고, 교회로서는 그것을 보수즈의 신앙의 변호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8. 해방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현상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휘말리게 되어 교회의 본질과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채, 이 갈등의 현장에 선봉에 서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정치도구와가 재연됐고, 공산주의 정권의 회유와 탄압으로 교회의 복음사역과 본질이 심각하게 변질되는 아픔을 겪게 됐다. 민족의 엄청난 시련 속에서 한국장로교회는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혼신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그 영향과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9. 근대화, 민주화 시기 상당 수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적 정당성이나 합법성을 확보하지 못한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한 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인식도 부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따른 편의적 대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보수적인 한국장로교회는 민주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매우 희박했고, 개교회의 성장에만 관심이 지대했으며,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교회와 국가에 대한 바른 입장과 태도를 견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기장 측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한국장로교회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가운데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10. 한국 교회가 국가에 끼친 영향이나 관계를 숙고해 볼 때, 우리는 적지 않은 모순과 상황에 따라일관적이지 못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최종고는 ‘국가와 종교’라는 그의 저서에서 초기의 한국개신교회의 국가에 대한 관계는 “어떤 정리된 원리나 전통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간헐적, 사실적 접촉의 집적(集積)으로 이루어졌다”고 진단했다. 양낙흥도 해방이후의 시기에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저웁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라며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는 측면에서도 실패했다고 언급했다.

 

11. 그런 면에서 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좀 더 장로교회의 교회론적 본질과 원칙에 적합한 일에 매진해야 할 때가 됐다. 특히 국민 간의 화합과 소통에 앞장서고, 불우한 이웃들에게 나눔의 사역을 통해 계층 간의 불화와 위화감을 불식하는데 앞장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노력해왔듯이 북한선교의 길을 모색하며 통일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전력해야 한다.

위의 내용은 한국장로교신학회 논문집 제9호(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학술지1, 주제: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100년을 돌아보며) ‘장로교회와 신학’에서 발췌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박응규, “한국장로교회가 국가에 미친 영향”, 장로교회와 신학, 제9호(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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