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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역사와 신학

해방정국의 건국운동: 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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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교수, 서울신대 영익기념강좌에서 발표

 

2015년 4월 1일 기사

 

“1945년 8월 15일 해방됐을 때부터 9월 8일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한반도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건국논쟁과 투쟁과정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서울신대가 지난 4월 1일 오전 10시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해방 70주년과 한국 기독교’를 주제로 개최한 제19회 영익기념강좌에 발제자로 참여한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는 이같이 주장했다.

박 교수는 이날 ‘해방정국의 건국논쟁: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를 주제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이날 1945년 8월 15일 해방됐을 때부터 9월 8일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한반도에서는 어떤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어떤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끌고 있는 주도세력은 누구인가를 밝히는 한편, 해방정국의 건국운동이 오늘의 대한민국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한 달 동안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건국논쟁과 투쟁과정을 밝혔다. 그의 주된 주장을 요약해 실었다.                                                                                                                                                                                 

 

<해방정국의 건국 논쟁:인민공화국인가? 민주공화국인가?>

일제 강점기 한국사회는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는데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또한 해방 후 한국사회에는 문제가 있었다. 일제기 때부터 두 가지 흐름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크게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주로 미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은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고,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 노선을 따랐다. 이들이 바라는 국가는 미국이 실시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이런 신념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던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해방 직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소련에서는 볼쉐비키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고, 이 혁명은 삼일운동 직후 한국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약속국가들에게 접근했다. 세계의 식민지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횡포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며, 소련은 민족해방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실제로 소련은 많은 한국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훈련했고, 이들을 한국에 파송해 공산혁명을 주도했다. 이런 국제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사람이 바로 박헌영이었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송진우와 여운형이었다. 송진우는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사람이며, 여운형은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조만식도 있었지만 그는 당시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의 중심무대에서 비켜있었다.

1945년 여름을 지나면서 일본의 패색은 짙었고, 조선총독부는 패전 후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조선의 지도자들과 타협했다. 여기에 그 대상으로 부각된 사람이 바로 송진우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일본의 요구에 응했고, 송진우는 거절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의 주장은 현재 일본이 패전의 상황에 있으므로 기다리지 말고 일본으로 정권을 이양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 주체는 일제 말에 일본과 투쟁했던 혁명세력, 곧 공산주의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일본으로부터 권력을 받아 인민정권을 만들고, 이것은 노/농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주의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송진우는 새로운 나라의 정권은 일본이 아니라 연합군,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으로부터 받아야 하며, 그 주체는 3.1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인 임시정부가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진우는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동시에 임시정부는 우익이 주도하는 단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해방 직후 좌익의 국가건설 방향과 영향

8월15일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 첫 번째 만들어진 정치단체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이었다. 건국동맹은 일제 말 이만규, 장권을 중심으로 한 여운형의 직계 그룹과 정백, 조동호를 중심으로 한 원로 공산당 그룹(장안파 공산당)이 만들고, 여기에 후에 재건파 공산당으로 불리는 최용달, 이강국, 박문규 등이 가담한 좌익 통일전선이다.

여운형은 이 건국동맹을 모체로 소위 '중도 우파'라고 불리는 안재홍과 함께 건준을 만든 것이다.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안재홍이 부위원장이 됐다. 건준은 세 가지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째, 조선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어느 정도의 치안권을 줬다. 해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 조선인을 내세워 통치하기로 하고, 치안과 식량문제를 비롯한 상당한 권력을 여운형에게 넘겨줬다. 송진우를 포함해 보다 광범위한 민족지도자들에게 정권을 인수해 주려고 했으나 송진우는 여기에 반대했다.

둘째, 해방 직후에 소련 진주설이 상당히 퍼져서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줄로 알았다. 해방 당일에 미국이 아닌 소련이 전 조선에 퍼지면서 (소문) 해방 정국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해방 정국을 공산주의로 이끌고 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셋째, 해방 직후부터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이 석방돼 좌익에 커다란 힘을 더해 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이들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전투적으로 활동했다. 감옥에서 나온 정치범들은 직업적으로 훈련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만나서 마음껏 활동하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여운형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인민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국가는 인민이 주도하는 인민정권이다. 인민정권이란 노동자와 농민이 주동이 되고, 여기에 지식인과 소자본가가 참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여운형은 이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혁명세력이 주체가 되어 먼저 과도정권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하혁명세력으로 과도정부를 세운 다음에 인민대표자 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정권을 세우려고 했다. 특히 여운형과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정부를 만들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이 필요하며,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선취되어야 한다고 봤다.

 

 

해방 직후 건준의 열기는 대단했다. 사람들은 건준이 해방된 조국의 새로운 정부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이런 열기는 얼마가지 않아 바뀌게 됐다.

첫째, 미군 진주설이 새롭게 퍼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소련진주설이 한반도 전체를 강타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미군이 임시정부와 함께 진주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미군 진주설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세계가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 등장하는 것이다.

둘째, 건준을 지원했던 총독부의 입장이 바뀌어지고 있었다.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정권을 줬지만 다시 회수하려고 했다. 일본이 원하는 것은 단지 혼란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치안유지였다. 하짐나 여운형은 실제로 준 정부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결국 총독부는 다시금 원상을 복구하려고 했다.

셋째, 해방 후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유지계층의 등장이다. 한국사회는 반관반민의 유지라는 특별한 계층을 갖고 있는 유지들이 있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치안을 유지하고, 식량을 효율적으로 배급하기 위해 이런 유지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좌익의 세력이 밑바탕까지 영향을 끼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 민족주의자들의 국가건설 구상

해방 당시 우익의 대표적인 인사는 송진우였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정권의 인수를 거부하며, 연합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송진우의 영입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민족주의자들도 여운형에게 송진우의 영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건준 내의 급진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로 송진우는 친일파의 대변자라는 이유를 내세워 영입을 거부해버렸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건준을 개편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건준 내의 구조도 달라지게 됐다. 건준은 급진파 공산주의(박헌영 계열), 사회주의(여운형 계열), 원로 공산주의 계열(정백, 조동호)과 온건 민족주의(안재홍 계열)이 연합해 만들었지만 내부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반대로 민족주의 진영은 더욱 풍성해졌다. 안재홍은 더 이상 공산주의와 건준에 미련을 갖게 않게 됐고, 송진우와의 연합전선을 모색하게 됐다. 우파 내의 단일노선이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 공산주의 횡포에 환멸을 느낀 원로 공산주의 계열도 민족주의 노선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연합군이 등장하기 전에 지하혁명세력을 중심으로 괴도정부를 만들어 인민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건국 구상이었다면 송진우는 연합군을 기다려 연합군과 협의해 건국을 설계해야 하며, 이 건국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째, 송진우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새로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와 조만식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같은 정치사상을 가졌다. 이런 민주주의 이념은 1920년 후반 공산주의와의 심각한 논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민족주의 진영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사상적인 기초가 됐다.

 

 

둘째, 송진우는 우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환영해 과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정통성 있는 조선의 독립단체였다. 사실 송진우는 3.1운동의 배후 주역인 48인 가운데 하나였다. 임시정부는 오래 동안 좌익과 우익의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한 번도 민주주의 원칙을 버린 적이 없는 단체였다.

이승만, 김구로 이어지는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와 싸웠고, 중일전쟁 이후 중국 국민당의 요구로 좌우합작 정부가 됐지만 항상 주ㅈ도권은 우익이 갖고 있었다.

셋째,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한국에서 정부로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국민대회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정부는 민족 대다수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진우는 미군이 서울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범 민족주의자들이 다 참여했다. 그는 여기서 연합군 환영, 임시정부 지지, 국민대회 개최를 선언했다.

# 왜 인민공화국이 아닌 민주공화국이었는가?

9월 초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진영에는 비상이 걸렸다. 해방 직후 지하의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만들고, 그 다음에 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정식 정부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건준 내의 헤게모니를 두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고, 분명히 자신들에게 호감을 갖지 않은 연합군이 오고, 임시정부 봉대론이 강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쫓기는 가운데 이들은 9월 6일 소위 인민대표자 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들은 임시정부를 반대하는가? 임시정부는 자멸할 단체라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인민의 토대 위에서 세원진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임시정부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있다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국가는 국내에서 지하조직을 갖고 투쟁한 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준의 이런 생각은 당시 일반적인 한국인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당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인사인 이승만과 김구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던 송진우, 안재홍, 조만식, 김창숙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군은 9월 8일 서울에 도착했다. 미군은 형식적으로는 미군정외에는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 임시정부도, 인민공화국도 부정했다. 하지만 미국은 과연 어느 정부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미국의 이해와 합치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미국은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인민공화국을 만날 수는 없었다. 결국 미국이 내린 결론은 임시정부였다. 그래서 미국은 비록 개인적인 자격이기는 하지만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을 서둘렀고, 이들을 통해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미국은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나라가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환다고 못박고 있다. 만일 우리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따라 역사를 기술한다면 우리는 해방 직후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송진우를 중심한 민족주의자들의 임시정부 봉대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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