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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성도들이 설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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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연구(19)

 

 

‘설교 플롯과 반전의 깨달음 / 이승진 교수(합신대)

 

2015년 5월 18일 기사

 

이승진 박사(합신대)는 한국실천신학회(회장:김한옥 박사, 서울신대)가 지난 5월 16일 한세대학교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밝히는 실천신학’을 주제로 개최한 제56회 정기학술대회에서 ‘설교 플롯과 반전의 깨달음’을 주제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한국 교회의 설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소통의 단절 현상을 진단하면서 회중과의 영적 친교와 연합을 회복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주된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편집자 주>

 

# 영적인 친교를 방해하는 설교

주일에 신자들이 강단 앞에 모이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예배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는 청중의 간절한 희망이며, 그런 열망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그러한 영적인 친교를 위한 중재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교회 안에서는 설교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영적인 친교와 연합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목회자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데, 신자들은 그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하면 신자들은 그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목회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견해라고 폄하하는 경우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설교자들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신자들은 그 메시지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고 무의미한 소음 정도로 무시하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설교를 통한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전했던 복된 소식을 설교자들이 그대로 전하는데도 청중은 그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일들이 발생할까?

설교자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설교문을 준비하여 강단에 올라 설교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청중은 점차 설교에 흥미를 잃고 더 이상 설교를 살아계신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the Word of God)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통이 실패하기 때문에, 청중이 설교에 대하여 기대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도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설교자는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설교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설교자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선포함으로 수 많은 영적인 감동과 변화를 일으켰던 동일한 메시지를 설교하는데도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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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인 친교에 실패하는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삼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서 그의 백성인 신자들과 맺은 새언약에 근거하여 영적인 친교와 연합을 회복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와 연합을 경험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청중 편에서의 영적인 변화(spiritual transformation)를 통해서이다. 그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으로의 변화이며, 청중의 문제로부터 하나님의 해결책으로의 변화이며, 옛사람의 사망으로부터 새사람의 탄생과 성숙으로의 변화이며,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축복으로의 변화이다.

설교를 통한 청중의 영적인 변화는, 단순히 무지에서 깨달음으로의 지적인 변화 뿐만 아니라, 타락한 성품과 행동으로부터 거룩한 성품과 행동으로의 전인격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물론 설교 한 편을 통해서 신자에게 남아 있는 특정한 타락한 성품과 행동이 곧바로 거룩한 성품과 행동으로 곧바로 바뀌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설교 한 편은 그러한 성품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전환점(turning point)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설교는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의 영적인 친교와 연합이나 영적인 변화는 고사하고 설교자와 신자들 사이의 소통도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대 설교에서 설교자와 신자들 사이의 소통이 실패하는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강단에서 설교자가 신자들을 무시하거나 자신과 다른 존재로 차별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청중을 자신보다 영적으로 열등한 존재나 혹은 영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설교하면, 청중은 그 설교 메시지에 마음을 열지 않고 설교 메시지를 경청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통이 실패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을 자신들과 여러 수준의 차원에서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면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효과적인 소통은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통 실패는, 곧 청중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인 친교와 연합의 실패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의 영적인 친교를 추구하는 설교가 오히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통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동일성의 철학과 비인격적인 물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청중을 향하여 고함을 치고 야단을 치는 이유나 동기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 추정 가능한 이유는 설교자가 설교 메시지를 준비하여 강단에 올랐을 때, 스스로를 여러 관점이나 수준의 차원에서 청중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청중은 무지하거나 영적으로 미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설교자는 스스로를 성경과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 해박하고 아는 바를 잘 실천하는 거룩한 존재이지만, 회중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암시적인 차별성은 강단에서 설교자의 비구어적이지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어투를 통해서 구어적인 메시지보다 더 효과적으로 은연중에 청중에게 전달된다.

설교자의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어투(語套)가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소통을 오히려 방해하고 결국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영적인 친교도 방해하기 때문이다. 어투(語套)의 사전적인 의미는 ‘말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방식이나 느낌’이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에 관하여 설교하지만, 청중은 설교자의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언행으로부터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제대로 느끼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설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급기야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일부 설교자들은 설교 시간에 청중을 향하여 고함을 치거나 야단치는 어조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설교자는 잘 깨닫지 못하겠지만 이런 언사나 어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친교를 추구하는 회중의 설교에 대한 기대감을 무너뜨린다.

현대 설교가 청중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인 친교를 달성하는 문제의 배후에는 설교자가 신자들에 대하여 주체와 객체를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타자를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인 위치로나 관점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 타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비판시하며, 자기우월적인 논리로 타자에게 과도한 권위를 행사하며 억압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영적인 친교가 오히려 청중 소외나 설교적인 친교로부터의 박탈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결과는 비인격적인 물화의 관점에서 분석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 설교가 하나님과 청중 사이의 영적인 친교를 이루지 못하고 설교자가 두 세계를 중재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로, 설교자가 강단 위에서 청중을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이 제거된 비인격적인 사물처럼 간주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는 설교자가 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접근 방법을 따라서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문을 준비하다보니, 결국은 설교자가 청중을 단순히 논리적인 정보만을 흡수해야 하는 비인격적인 물체처럼 탈인격화하고 사물화(事物, Reification)하여 청중을 대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사회 속에서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비인격화되고 마치 물건을 대하듯 하는 물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물화된 관계에서는 더 이상 소통과 친교는 기대할 수 없고 가치의 우선순위에 의하여 비인격적인 소외와 차별, 분리, 그리고 박탈이 발생한다.

이러한 물화 현상은 비단 자본주의 사회나 조직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청중을 배제시키는 언사를 사용할 때에도 발생할 수 있다. 또 복음전도의 현장에서나 설교 현장에서 목회자/설교자가 자신과 타인을 비인격적인 동일화의 관점에서 분리하고 그러한 차별과 분리의 토대 위에서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다보면 자문화우월주의적인 복음전도/설교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진리를 깨달은 자신과 무지한 타인의 차별구도나 성/속의 이원론적인 구분을 전제로 하는 설교자들의 권위적인 설교 방식이, 설교자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가진 타인들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기류 속에서 진행될 때에 설교 소통은 필연적으로 단절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월적인 지위를 주장하는 설교자 안으로 일반 신자들을 동일시적으로 환원하여 비인간화하려는 설교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변화를 이끌어내는 설교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청중의 영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그 설교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세계와 청중의 세계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별성과 심연의 간격을 서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두 세계로의 급격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현격한 반전의 과정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두 세계 사이의 현격한 반전을 이끌어내려면, 설교의 삼요소인 내용과 형식, 그리고 목표가 설교학적인 반전을 중심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설교의 내용이 두 세계를 언급해야 하며, 설교의 형식이 두 세계의 반전 과정을 담아야 하며 설교의 목적은 청중이 설교를 통해서 두 세계 사이의 현격한 반전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세계 사이의 현격한 변화와 반전, 그리고 대비를 가져오는 설교의 내용은, 신자의 문제와 하나님의 복음에서 확보된다. 성경은 전체가 대반전의 드라마로 이루어졌다. 삼위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원한 지혜와 영광으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첫 인류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청하신다.
하지만 사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첫 인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 비극이 찾아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 안에서 신실하시게 사단의 반역을 무력화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다시 회복하실 계획을 예고하시다가 드디어 마지막 때가 차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타락한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시도록 한다.

 

 

하지만 사망 권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도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사망 권세 이기며 새생명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대반전의 드라마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대반전의 드라마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내용에 관한 구속 내러티브(redemption narrative)로 보존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대반전에 관한 구속 내러티브는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반전과 변화를 담고 있다.

구속 내러티브는 타락한 죄인으로부터 구속받은 의인으로의 변화를 담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 안에서 옛사람의 죽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서 새사람의 탄생으로의 반전과 변화를 담고 있으며,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은 이타적인 새사람으로의 변화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대반전을 추구하는 성경의 구속내러티브를 설교하여(의미수반발화행위),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도 무지로부터 깨달음으로의 대반전이 발생하도록 설교해야 한다(효과수반발화행위).

그렇다면 이상의 대반전의 내용을 설교하여 청중에게 실제로 대반전의 효과가 발생하도록 설교할 수 있는 설교의 형식이나 방법은 무엇일까?

설교자는 청중을 ‘이타적인 자아’로 인식할 수 있는 설교학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청중에 대한 ‘이타적인 자아관’에 근거하여 반전의 깨달음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설교 플롯이 필요하다.

설교가 반전의 깨달음을 통한 영적인 변화와 연합의 효과수반발화 효과를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전의 깨달음’이란 설교 주제가 인지적인 차원으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목회 실천을 통해서 실천되고 구현되어야 한다.

실천이 없는 반전과 깨달음은 여전히 비인격적인 동일자의 한계에 포섭된 언어유희에 불과할 뿐이고, 설교가 영적인 변화와 연합으로 청중을 설득하려면 설교자와 교회가 함께 전하며 만들어가는 공동체적인 이야기가 그 전하는 내용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의 관점에서 볼 때, 반전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설교는 설교자가 청중을 자신과 또 다른 자아, 곧 타자로서의 자아로 연합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윤리적인 요청에 대하여 응답하는 과정에서 섬김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설교이다.

 

 

이렇게 자아 이해에 대한 성경적인 반전을 가져다 주는 설교의 핵심 메시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거나,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깨달음이다(갈 2:20). 그러므로 나는 예전의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인 타자를 섬기는 삶을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섬김의 내러티브는 설교자 개인이 청중에게 타자에 대한 섬김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설교가 아니라 모든 교회 신자들이 타자로서의 자아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자아 정체성에 관한 내러티브가 누적됨으로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동체적인 정체성의 내러티브(community identity narrative)이다.

기독교 설교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 역사에 관한 직설법적인 진술로서의 구원 내러티브만을 다루지 않고, 그 구원 내러티브가 특정한 시점에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를 구성한 회중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법도 함께 제공한다.

그리고 기독교 설교는 말씀에 대한 신자들의 실천을 유도하는 명령법적인 지침들을 일방적으로 쏟아놓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에 대한 회중의 실천적인 반응과 순종의 경험들을 유도하는 공동체적인 활동들과 연결되어야 하며,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서 설교자들은 회중과 함께 공동체적인 연대감을 담은 공동체 정체성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설교자가 일차적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이타적인 자아에 관한 반전의 깨달음을 설교로 전달하면 청중도 이타적인 자아에 관한 깨달음을 통하여 변화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깨달음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누적될 때 신앙 공동체 전체가 이타적인 자아에 관한 섬김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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