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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육•윤리와 신학

[그때 그 기사-8] 교회의 사회적 책임, 본회퍼에게 듣는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21.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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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그때 그 기사] '코로나 19' 팬데믹은 현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된 문제이며, 최고의 관심사다. 목회 현장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한국 신학계의 주된 논의 주제도 '코로나 19'다. 코로나 19로 한국 교회 목회현장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에 따른 목회적 방향성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 등 코로나 19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현 시대 목회적 상황에 매우 적절하면서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슈지만 한국 교회 목회 현장을 위해 보다 다양한 신학적 논의의 필요성에 대한 아쉬움도 든다. 이에 본지는 '그때 그 기사'라는 특집 코너를 통해 코로나 19 전에 신학계의 주된 논의가 무엇이었는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어떤 내용에 관심을 가졌는지 본지의 기사 중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내용을 다시 게재함으로써 '그 때 그 묵상'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편집자 주>

 

2014년 4월 16일. 결코 잊을 수 없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묵상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떠오를 때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알기에, 그 분노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아픈 문제를 알기에,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를 알기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말씀에 따라 함께 울 뿐이다.

 

 

당시 한국교회 목사와 성도들은 많이 아파했다. 직접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면서 그들과 함께 울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 아픔과 슬픔, 분노를 외면했고, 심지어 유가족들의 가슴을 날선 칼로 후벼파듯이 몹쓸 망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 교회가 반드시 사랑하고, 포용해야 할 이웃들의 고통이었다.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며, 함께 울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사고 이후,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세월호 이후의 신앙'에 논의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사진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eanet

 

지난 2015년 4월 한국기독교윤리학회에서도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슬픔과 아픔에 처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한국 교회의 신학과 윤리,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당시 학회는 민중의 억압 속에서 고난당하는 여러 나라들의 무법적 독재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모범이 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순교 70주년을 맞아 그의 '타자 신학'을 중심으로 세월호 사고와 관련지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뤘다.

 

그때 본지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발제자들의 연구논문 중 일부를 <본회퍼에게 듣는다>라는 연재 기사로 작성한 바 있다.

 

계속되는 위기, 끝없는 고통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지속돼야"

 

현재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라는 팬데믹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는 유동적이지만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내몰리며 고통받는 이웃들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잇따라 발생한 교회의 집담감염은 교계와 방역 당국, 사회의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교회와 정부의 갈등, 교회와 사회의 갈등이 일어났고, 사회적 이슈로까지 번졌다. 정부의 방역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은 "종교적 탄압"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코로나 재확산의 책임. 사실 교회는 여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자유로우면 안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회적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추구해야 하는 공공성이 있으며, 신자가 추구해야 할 공적 신앙이 있다. 그리고 공공성도, 공적 신앙도 반드시 사회적 책임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자"

 

물론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 수 없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는 있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 울 수 있고,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다 .

 

'타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본지는 '그때 그 기사'라는 특집코너를 통해 본회퍼가 한국 교회에 촉구하는 내용들을 다시금 게재하면서 고통과 아픔에 처한 이웃들을 향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신앙적 각오를 다시 점검해보고자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02.04~1945.04.09)

 

‘나를 따르라’에서 ‘윤리학’까지:본회퍼에게 있어서 윤리적 사고의 발전 
/ 강안일(성락성결교회, 서울신대)

 

“오늘날 한국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거기 있을 때만 교회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신앙과 행동의 통일성을 통한 제자도의 회복과 타자를 위한 삶의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오늘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나를 따르라’로부터 ‘윤리학’의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스스로 가신 길이며, 우리가 그와 함께 가야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보지 않고, 먼저 가시지 않는 길로는 우리를 초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가신 길은 하나님께서 여신 길이요, 보호된 길이다. 그래서 그것은 실제적으로 그의 길이다.”

‘나를 따르와’와 ‘윤리학’을 통해 본회퍼는 바로 하나님의 길을 따라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통일적인 계속성과 계속적 발전성의 관점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 그리고 여기서’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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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타자 위해 존재한다"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값비싼 제자도는 구체적으로 신앙과 복종(순종), 칭의와 제자도, 은혜와 행동(삶)의 밀접한 통일성이다. 그리고 본회퍼가 ‘윤리학’에서 중요하게 다른 ‘책임’이라는 사상을 다시 한국 교회는 붙잡아야 한다. 본회퍼의 책임은 오늘 여기서 모습을 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 앞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책임(책임의 윤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과 책임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나 민중을 위해 알량한 동정심을 베푸는 정도의 교회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교회의 본질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형상을 통해 구체화 한 책임의 사상을 배워야 한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거기에 있을 때만 교회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 신앙과 행동의 통일성을 통한 제자도의 회복과 타자를 위한 삶의 책임은 오늘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모습일 것이다.

 

 

 

 

고통에 대한 윤리적 접근:레비나스와 본회퍼를 중심으로
/ 이상철(한신대)

 

"기독교윤리학은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 땅과 격리시켜 바라보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곧은 정신이다. 따라서 기독교윤리학은 고통을 왜곡하고 감추려는 현실의 권력을 폭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수님도 '대신' 죽으셨다"

 

 

‘대리’ 개념은 본회퍼의 교회론 ‘교회는 타자를 위해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는 고통의 짐은 모든 인간의 고통을 대리한다.

‘대리’의 결과 그리스도가 세상을 대신해 죽었고, ‘대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면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었듯이, 교회 역시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의 고통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의 대리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고통의 한 가운데 위치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배하면서가 아니라 돕고 봉사하는 방식으로 참여해야 한다.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추상적인 논증에 기반한 교회가 아니라 구체적인 섬김의 실천에 있다. 교회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 그 무게와 힘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윤리학은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 땅과 격리시켜 바라보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곧은 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고통 외면하는 권력 폭로하라"

 

고통은 삶의 조건이고 양태다. 고통은 회피의 대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숭배와 신비의 대상도 아니다. 기독교윤리학은 이렇듯 고통에 대한 신화화와 탈역사화에 대해 저항하면서 고통을 왜곡하고 감추려는 현실의 권력을 폭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을 감싸고 있는 진실을 밝혀내고, 그 진실의 힘으로 현실의 고통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해체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독교윤리의 현상학이다.

 

 

탐욕의 길 VS 제자의 길:본회퍼 윤리의 한 응용
/ 문시영(남서울대)

 

"제자의 길. 두말할 필요 없이 절실하다. 한국교회는 본회퍼가 구현한 '제자의 길'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실천적 관심을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탐욕이 문제시되는 한국사회에서 금욕의 길을 넘어 제자의 길을 모색하는 자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탐욕의 대안, 제자됨"

 


금욕을 통해 자기 의에 빠지기보다 제자됨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본회퍼의 제자윤리의에서 탐욕의 대안은 탐욕의 극복 내지는 금욕이 아니라 제자됨이다. 심지어 제자의 길은 금욕을 통해 탐욕을 기여내는 것보다 더 어렵고 좁은 길이다.

 

‘탐욕의 길’은 ‘제자의 길’에 대조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만이라도 탐욕의 길에서 벗어나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인가? 하지만 ‘번영의 복음’이 교회 안에서까지 탐욕의 길을 부추고 있는 한국적 정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탐욕의 대안세력으로 제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제자의 길에 대한 통렬한 재인식이 절실해 보인다.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세상 속에서 사는 길이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본회퍼의 질문,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 누구인가?”의 문제는 그의 삶과 신학의 주제다. 탐욕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를 것 없다. ‘자기 의’에 입각한 금욕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제자도의 구현과 탐욕의 극복에 대해서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탐욕의 시대에 금욕을 넘어 그리스도의 제자됨,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교회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 혹은 ‘번영의 복음’에 길들여지고 집착하는 오늘의 한국기독교가 재조명해야 할 제자윤리다.

 

 

"제자의 길, 어떻게 구현할까?"

 

 

제자의 길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첫째, 제자의 길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오늘의 기독교는 어떻게 제자의 길을 구현할 것인가가 문제다.

윌라드(Dallas Willard)는 현대의 교회가 제자도를 상실했다고 진단하면서, 그 원인을 진정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잃어버린데 있다고 말한다. 본회퍼가 말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상당부분 유사한 것일 듯 싶다.

윌라드에 따르면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손쉬운 기독교 혹은 값싼 은혜를 질타한 명저임에 틀림 없지만 이 책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다. 제자도를 값비싼 영적 잉여물, 특히 ‘수퍼 크리스천’의 전유물로 간주하는 그릇된 시각이 여전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제자의 길을 사회적 책임의 구현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탐욕의 길을 극복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제자가 걸어야 할 길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실천의 방식은 히틀러 시대의 본회퍼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최근의 신학적 관심들을 동원해 말하자면 ‘공공신학’은 제자의 길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통로가 될 것 같다. 본회퍼의 신학에 공적 책임에 대한 단서들은 충분해 보인다. ‘타자를 위한 존재’, ‘세상 속에있는 제자’ 등의 개념은 현대적 의미의 공공신학과 동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공공성 함양을 위한 관심과 노력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의 관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민사회 속에서 교회가 공공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적극적인 실천을 보여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 교회의 태도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반성 
/ 이동춘(장신대)

 

이제 한국 교회의 자리는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나타나야 한다. 특히 힘이 없고, 돈이 없어 고통 받는 타인을 향한 대리행위가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 대리행위는 단순한 연민이 아닌 연대함이어야 한다. ‘그가 나’라는 책임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3가지 죄"

 

본회퍼의 ‘타자 신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 교회의 태도 중 옳지 않은 태도를 죄로 규정한다면 한국 교회는 이기성의 죄, 책임전가의 죄,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꾸는 죄를 짓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기성의 죄’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태도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해운회사, 해운회사를 감독 지도하는 기관, 정부 모두의 총체적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사고다.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저지른 범죄다. 더 나아가 국가범죄였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2014년 5월 20일 한기총 부회장이었던 조광작 목사의 발언(가난한 집 애들이 분에 맞지 않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처럼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다.

이웃의 아픔을 간과하지 말라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태도다. 본회퍼는 우리가 “인간을 멸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인간 멸시로 인하여 우리는 바로 적의 최대 오류의 포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 신정론으로 치부하는 ‘책임전가의 죄’다. 김삼환 목사의 발언이나 국무총리 후보였던 문창극 씨의 ‘하나님의 뜻’ 발언이 해당된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하나님이 인지하고 계시는 사건이 아닌 것은 없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해자의 폭력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인지하신다는 의미이지 세월호를 대국민을 회개시키는 도화선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은 어리석고 무지한 태도다.

 

셋째, 무력함을 핑계 삼는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꾸는 죄’(침묵)다. 물론 침묵이 소위 기독교 영성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침묵 속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선이 파멸의 위협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침묵하는 것은 죄가 된다. 본회퍼는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죄”라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그러므로 본회퍼가 볼 때, 하나님의 침묵을 들어 침묵하거나 무력함을 핑계 삼아 침묵하는 등의 태도는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이해시키는 태도에 불과하다.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로"

 

 

 

한국 교회의 자리는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나타나야 한다. 특히 힘이 없고, 돈이 없어 고통 받는 타인을 향한 대리행위가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 대리행위는 단순한 연민이 아닌 연대함이어야 한다. ‘그가 나’라는 책임이어야 한다.

이런 책임 하에 한국 교회가 세월호 참사로부터 받은 숙제는 '악의 평범성'을 지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에 있다. 국가의 무책임으로 죽음 참사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으면서 참사의 은폐와 조작을 지시하는 국가와 권력의 명령에는 책임을 느끼는 이이히만과 같은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숙제다.

이 숙제는 정의로운 한국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를 통해 사건을 왜곡, 조작하는 국가와 그 국가의 명령에 움직이는 이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선을 찾고, 그 선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임적 행동은 철저히 익명에 의한 대리행위, 낮아짐의 대리행위여야 한다.

 

 

 

[그때 그 기사 링크]

 

본회퍼에게 듣는다①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①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 2015년 4월 15일 한국기독교윤리학회(회장:유경동 교수, 감신대)가 지난 4월 11일 ‘세월호 이후의 

www.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② “고통 왜곡하는 현실 권력 폭로하라” (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② “고통 왜곡하는 현실 권력 폭로하라”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5년 4월 15일 기사 한국기독교윤리학회(회장:유경동 교수, 감신대)가 지난 4월 11일 ‘세월호 이후의 신학

www.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③ “금욕을 넘어 제자의 길을 추구하라” (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③ “금욕을 넘어 제자의 길을 추구하라”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5년 4월 15일 기사 한국기독교윤리학회(회장:유경동 교수, 감신대)가 지난 4월 11일 ‘세월호 이후의 신학

www.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④ “교회 자리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theosnlogos.com)

 

본회퍼에게 듣는다④ “교회 자리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윤리 /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본회퍼 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5년 4월 15일 기사 한국기독교윤리학회(회장:유경동 교수, 감신대)가 지난 4월 11일 ‘세월호 이후의 

www.theosn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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