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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정치도 기독인의 사명” 신앙과 정치 구별해선 안돼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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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정치하는 그리스도인’ 주제로 연중기획 제1차 신학캠프 개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3월 19일(토) 느헤미야 3층 강의실에서 ‘정치하는 그리스도인’을 주제로 ‘2016년 연중기획 제1차 신학캠프’를 진행했다. ‘구약, 그 정치적인 말씀’,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주제로 발표한 김근주, 조석민, 김동춘 연구위원의 주장을 일부 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주>

 

 

 

개인 영적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 훼손 행위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항상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대개 복음 전파만이 자신의 관심사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균형을 상실한 견해다. 정치와 구별되는 개인의 ‘영적’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여기는 견해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본질 자체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예수님의 선포는 개인 윤리에 불과하다. 신약 성경의 첫 권으로서의 마태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은 ‘나라’(바실레이아)다. 마태복음이 이렇듯 나라를 둘러싼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를 드러내고 있다면 기독교 정경으로서의 마태복음은 필연적으로 구약에 대한 정치적 이해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와 바울이 전한 복음도 하나님 나라였다.

 

 

 

 
 

구약의 중심도 하나님 나라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하나님의 세상 통치, 다스리심(정치)을 보여주는 구절들이 구약에 무수히 등장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은 세상 질서를 뒤덮으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구약은 하나님이야말로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증언한다. 사람이 행하는 정의와 공의가 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삶임을 보여준다. 구속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돼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 대속은 단순히 개인적인 어떤 것이지 않다. 구속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제자됨의 근본적인 차원이다.

 

하나님의 왕되심은 현실의 왕들에게는 위험한 사상이다. 따라서 왕들은 종교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부분에 집중하게 한다. 구약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구약을 축소시키게 한다. 구약이 축소될수록, 신약이 ‘영적’으로 해석될수록 교회는 현실에 무관심해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의 눈물은 더욱 커져 갈 것이다. 왕들의 권세는 더욱 견고해져 갈 것이며, 사람들은 이 모든 슬픔으로 인해 더욱 ‘영적’이고 내면적 위로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교회와 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하며 견고해질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내면화, 복음의 개인화는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복음을 뒤틀어버린 것이다. 복음을 이 세대의 왕들이 기뻐하는 형태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다. ‘공중권세 잡은 이’의 핵심적 전략이 바로 이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근주>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성경 오용은 안돼

 

 

 

마가복음 12장 17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부 권위에 대한 대답도 아니며,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구분된다는 기준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은 로마의 주화인 데나리온에 새겨진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그 곁에 새겨진 문장이 잘못됐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로마 황제가 하나님도, 대제사장도 아니라는 사실을 로마의 신성모독적인 주화를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성전에 신성모독의 주화를 바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이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이 말씀은 종교와 정치의 문제에 등장하며 자주 오해되고 있는 본문이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거대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해당 본문은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의 가르침을 전제로 한다.

 

 

 

 

 

 

 

바울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권력의 기원과 정당성의 근거를 본문에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실제 행정 담당자의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이해하라는 의미다.

 

국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것일지라도 그 자체가 신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해당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은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설정 또는 임명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질서가 아니라 주권적인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로마서 13:1~7은 바울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지배 아래 있는 정치권력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결코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해당 본문은 국가 질서에 대한 신학 근거로 간주돼 불의한 정부에 복종하게 하는 보편타당한 규범이 되도록 오용되어서는 안된다.

 

본문은 세상의 모든 권위가 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본문을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해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윤리의 명령으로 이해해 오용되어서는 안된다.

 

베드로전서 2장 13~14절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이 본문은 로마서 13장 1~7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체주의 국가의 모든 범행을 받아들이고 협력하라고 명령하는듯 하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 역시 바울과 마찬가지로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교훈하면서도 로마황제도 사람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암시한다. 그러므로 로마황제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권위에 대한 복종의 조건은 주님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용되지 말아야 한다. 이 본문 역시 정교분리나 국가와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교훈하는 것으로 오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치가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교회공동체는 공적기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려 공정하게 정치의 역할을 공적으로 담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사랑과 정의, 평등과 화평을 이 땅에서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개인은 세상 정치를 향하여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이며 세상 정치에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세상에서 완벽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지만 최소한 사회정의를 실천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치를 하도록 그리스도인은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양심의 목소리를 정직하게 내뱉지 못하면 길 가의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거대한 구조악과 무서운 정치세력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무력감이 극대화되고 있는 세상이다. 민중혁명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선거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밖에 없다. <조석민>

 

 

 

 

 

 

 

바른 정치적 고백과 실천은
교회의 공적 증언이다

 

 

오늘날 사회는 공적 영역에서 교회의 역할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 비기독교 국가이든, 다종교사회이든 오늘의 국가에서 교회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분야가 증대하고 있다. 교회와 국가의 협력과 보완이 필요한 시대에 교회는 영혼구원을 담당하고, 국가는 세속사를 관장하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인 도식이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의 정치와 인간의 정치를 결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정치는 지상왕국의 직접적 실현도 아니고, 교회의 세계 지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정치는 그러한 의미의 협의적 정치가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다스림이 원리적으로 실현되는 광의의 정치다.

 

하나님의 정치는 이 세상에서 보다 종말론적 통치 아래 궁극적으로 완성된다. 하나님의 정치의 완전한 실현은 종말론적 유보에 속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정정치의 직접적 실현을 꾀하는 근본주의적 정치권력의 비이성적 위험성을 초래한다.

 

따라서 기독교정치는 하나님의 정치의 위임정치, 즉 위임된 정치행위에 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위임받은 정치이며, 청지기적 정치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사태 앞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기도만으로 정치적 책임을 대신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모든 문화명령 가운데 또 다른 책임적 영역 중의 한 부분이다. 기독교정치는 하나님의 정치를 지향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정치적 역할과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정치적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정치를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행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정치적 신앙고백과 정치적 제자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에 관한 논의에서 그것을 지지정당의 선호도다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의 차원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치를 사사화의 문제로 간주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교회의 공적신앙 고백이며, 세상을 향한 교회의 공적증언이 된다.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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