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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전도는 낳고, 키우고, 심고, 뽑고, 파괴하고 건설하는 것"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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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선교에 나타난 전도, 회심, 교회개척의 특징 / 김철홍 교수(장신대)

 

2014년 11월 21일 기사

 

“바울에게 개종은 과거의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종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준 소명을 자신의 소명으로 보고 파괴와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으로 전도했다.”

“바울에게 전도란 단순히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복음을 무기로 해서 그들의 생각 속으로 쳐들어가 기존의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물, 즉 기독교적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파괴와 건설의 관점에서 복음전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복음전도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런 변화가 수반될 때, 개종은 강력한 개종이 된다. 파괴와 건설이 둘 다 일어날 때, 그 결과로 A가 A로 변화하는 약한 개종이 아니라 A가 B로 변화되는 강력한 개종이 발생한다.”

새세대아카데미(원장:곽요셉 목사/연구소장:김선일 박사)와 예장 통합총회 목회정보정책연구소는 공동으로 지난 11월 20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21세기 한국 교회의 전도,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주제로 2014년 목회자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날 발제자로 참여한 김철홍 교수(장신대)는 ‘바울 선교에 나타난 전도, 회심, 교회개척의 특징’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바울의 선교(전도)사역, 목회사역 전반에 나타난 특징들에 대해 발표했다. 김철홍 교수의 발표내용을 정리했다.

 

 

# “아기를 낳고 젖을 먹여 기르는 것”

바울은 종종 자신을 아버지로, 그리고 자신의 개종자들은 그의 자녀로 묘사하면서(살전 2:11, 고전 4:12, 고후 6:13)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다”고 말한다(고전 4:15). ‘낳다’라는 메타포는 그의 청중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태어나는’ 것이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낳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아버지로서 자녀를 낳았다는 것을 넘어서서 바울이 자신을 여성으로 보고 아이를 낳고 젖 먹여 키웠다고 말하는 대목이다(갈 4:19).

바울의 이런 여성 메타포의 배후에는 헬라 종교, 철학적 배경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사야서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이사야서에는 여인의 임신, 해산과 젖을 먹여 양육함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다수 등장한다(사 54:1, 사 62:4, 49:15, 62:4~5, 42:14, 54:1 등).

이러한 구절들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새로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해 내실 것을 예언하는 것이며, 예레미야애가 1~2장에 등정하는 자식 잃은 여인인 시온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머니’인 시온(사 50:1)이 다시 아기를 낳게 하신다.

 


바울이 여성 메타포를 사용해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출산’과 ‘젖 먹여 키움’으로 본 것은 그가 ‘개종’과 ‘양육’을 그의 사역의 두 기둥으로 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개종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개종 언어로써 ‘낳다’와 ‘태어나다’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자신은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자신을 묘사한다. 또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옛 자아가 파괴되고, 새 자아가 창조되는 개종 과정을 묘사한다.

옛 자아의 죽음 없이 새 자아의 탄생은 없다. 기독교 개종자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사람이다. 특히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개종을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는 공간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의 노력은 실제로 성도들이 강력한 개종을 경험하게 했다. 바울은 자신을 부모로서 묘사하고, 개종자들을 그의 자녀로 설정했다. 유대사회에서는 물론이고 헬라사회에서도 자녀들의 교육, 사회와 과정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다.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로 설정하고, 그의 개종자들을 자녀로 설정한 것은 개종 이후의 양육과정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아버지의 매우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그의 개종자들이 듣고, 그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일차적 사회화 과정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전도하고, 가르침으로써 비록 개종이 이차적 사회화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화 과정을 진행했다.

 

 

# “뽑고, 심고, 파괴하고 건설하는 것”

바울은 심고 건설하는 사명을 가졌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표현하기 위해 ‘심다’와 ‘건설하다’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건축자로서 짓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었다. 그가 이 건축 프로젝트에서 소명으로 맡은 일은 건물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고전 3:10).

바울은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고후 4:5)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선포함으로(고전 2:2) 새성전의 기초를 놓는다. 그는 교회의 기초를 놓는 작업이 끝나면 그 다음 도시를 향해 떠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은 일단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보며, 어느 정도 교회가 세워지고 나면 그 이후의 일은 다른 사역자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자신이 남겨두고 떠나간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는 것은 그의 관행이었고, 그가 직접 방문할 수 없을 때는 동역자들을 보냈다. 이것은 곧 자신이 터를 놓은 교회를 향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의 씨앗을 심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성전으로 짓는 것 둘 다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울에게 개인을 개종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개종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궁긍적인 목표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뽑다’와 ‘파괴하다’는 바울의 사명은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2장 18절에서 바울은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건설할 뿐만 아니라 파괴하려는 일도 한다.

고린도후서 10장 8절과 13장 10절에서도 바울은 건축과 파괴를 대조한다. 바울은 동사 ‘파괴하다’를 자신의 소명에 적용해 자신을 구체적으로 ‘파괴자’로 묘사하기도 한다(고후 10:3~6). 특히 무기, TK움/전투, 견고한 진/요새, 사로잡다, 처벌하다 등의 단어들까지 사용한다. 로마서 1:5, 15:18, 16:26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을 향한 그의 사도적 소명과 복음전도, 순종을 함께 말하고 있으므로 전쟁을 통해 순종을 달성하는 것은 그의 사도적 소명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 바울은 성(城)을 공격해 파괴한다. 공격에서 그가 사용하는 ‘전쟁의 무기’는 칼과 창과 같은 ‘육체의 무기’가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라고 부른다. 그가 사용하는 이 강력한 무기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고전 2:2)에 관한 메시지라고 가정해도 무리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포로로 사로잡는다. 즉, 복음을 선포함으로 바울은 사람들의 논리적, 조직적 사고 체계인 그들의 비기독교적 세계관을 무너뜨린다. 바울의 청중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바울은 복음을 전도해 개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그들의 세계관을 무너뜨린다.

마치 예레미야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바울은 심을 뿐 아니라 뽑기도 하고, 건축할 뿐 아니라 파괴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의 씨앗을 심기 전에 그는 먼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뽑고, 건축하기 전에 유대교나 헬라-로마문화가 그들의 정신세계 속에 세워 놓은 비기독교적 건물을 먼저 철거했다.

바울에게 전도라는 단순히 복음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복음을 무기로 해서 그들의 생각 속으로 쳐들어가 기존의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물, 즉 기독교적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전도를 파괴와 건설, 뽑음과 심음으로 이해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우리는 전도를 파괴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건설과 씨 뿌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파괴와 건설의 관점에서 복음전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복음전도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런 변화가 수반될 때, 개종은 강력한 개종이 된다. 파괴와 건설이 둘 다 일어날 때, 그 결과로 A가 A로 변화하는 약한 개종이 아니라 A가 B로 변화되는 강력한 개종이 발생한다.

잘못된 가치관과 세계관에 아무런 손도 대지 않은 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만 한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강력한 개종이 우리의 청중들에게 일어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강력한 유일신관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이전에 유일하신 하나님인 창조주에 관해 먼저 말해야만 했다. 바울의 복음은 배타적이다. 바울은 우상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바울은 유일신관을 가르쳐 우상숭배의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그들의 세계관의 기초를 파괴했다. 우상숭배의 신학은 헬라 세계관의 뼈대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우상을 버리는 것은 헬라 종교적 사고방식, 관습, 세계관을 통째로 버리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바울의 전도는 헬라인들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의 전도는 파괴 후 건설이다.

전도를 할 때, 그 사람의 현재 세계관이 잘못돼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그것을 무너뜨리면 강력한 개종이 일어난다. 파괴가 있었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돌아갈 가능성이 적다. 여기에 바울이 핍박을 이기는 성도를 만들어낸 첫 번째 비결이 있다. 우리도 전도할 때,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치관관 세계관을 지탱하는 뼈대는 물질지상주의다. 우리는 물질주의를 비판하여 한국인의 세계관/가치관을 무너뜨려야 한다.

 

 

# 바울의 전도, 개종, 교회 개척의 방법에 나타난 특징들

바울은 분리언어를 사용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외인”이라고 부름으로써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렇게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바울의 마음 뿐 아니라 그의 청중들의 마음속에 어떤 경계선이 있을 때 가능하게 된다.

바울은 ‘외부인-내부인’(살전 4:12/고전 5:12~13)과 같이 인류를 두 종류의 범주로 구분하는 분리언어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예를 들면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잠든 자들과 깨어있는 자들”(살전, “술 취한 자들과 경성한 자들”, “진노 아래 있는 자들과 구원 아래 있는 자들”, “소망이 없는 자들과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쓴 자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들”, “불신자들과 신자들” 등이다.

이렇게 분리언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며,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울은 또한 다수의 대상을 놓고 설교하기보다 일대일 관계를 통해 전도했다. 바울은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성도들을 가르쳤다. 물론 두란노서원에서 강론하거나 아테네 광장에서 강의하면서 토론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가정교회에서의 예배, 회당에서의 설교를 제외하고 바울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전도하는 장소는 작업장이었다.

그의 직종은 천막 만드는 것이었다. 살전 2장 9절에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숙식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노동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낮에는 일하고, 퇴근 후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노동하면서 전도했다. 천막을 주문하러 온 고객들에게 전도한 것이다. 작업이 없는 날에 바울은 시장골목에 있는 다른 가게, 다른 작업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고객들에게 전도했을 것이다.

작업장은 헬라철학자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했던 장소들 중의 하나였으므로 종교적 도덕적 가르침을 위해 문화적으로 적절한 장소였다. 그들이 오면 바울은 일을 하면서 그들과 장시간에 걸쳐 일대일로 대화하면서 전도했을 것이다. 일대일 대화는 바울이 사용했던 가장 기본적 복음전도의 패턴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고난과 종말의 예고도 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이 비록 믿음을 가진 기간은 짧았지만 그들이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바울이 미리 고난에 대해 예고하여 고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세례를 받게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그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미리 알려줬다. 신앙이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마 13:44~46) 그 대가를 지불한 사람만이 진리와 생명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그들이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그들이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바꾸어야 할 대가는 한 마디로 그들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며, 이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했다. 바울은 청중이 즉각적으로 그의 복음에 응답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 세대의 끝에서 살고 있었고(고전 10:11), 정해진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고전 7:29). 유대교와 당시 대중들이 믿던 이방 종교들과 달리 바울의 메시지는 청중들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줬다. 그 결과 청중들은 결단을 내려야 할 압력을 받았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고, 이것은 개종을 촉진하는 요소였다.

바울의 복음은 임박한 심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동시에 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준다. 바울은 나쁜 소식(심판)과 좋은 소식(복음)을 동시에 제시하며, 예수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대해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비판하고, 그래서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한 뒤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는 질문이 생겨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대해 설명한다. 그렇게 했을 때 효과가 가장 크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들의 타락한 문화에서 분리해 새로운 공동체(교회)에 가입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임박한 종말과 재림에 관한 메시지는 강력한 유일신관에 관한 메시지를 이어받아 개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종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는 이보다 그 중요성이 못지 않은 또 다른 기능을 갖고 있었다. 종말과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박해 상황에서 개종자들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력한 박해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배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택이며,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은 편할지 모르나 결국은 멸망의 길에 불과하다. 삶을 선택하려면 교회 안에 남아 있어야 희망이 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곧 임하고, 지금 핍박받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개종한 사람들이 박해 상황에서 교회 안에 계속 남아 있도록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종말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성도들이 견딜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일종의 위기관리로서 현재 경계선을 다시 넘어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을 저지하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비록 6개월 밖에 믿지 않았지만 박해를 견디어낸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종말, 심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잘 가르쳤기 때문이다. 종말에 관한 가르침은 박해받는 교회에 가장 큰 위로를 준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가르친 종말에 관한 메시지는 그 자체로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살전 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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