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목회와 신학

성차별 설교, 여성에겐 복음 아닌 독음이며 폭력이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728x90
반응형

 

* 설교연구(18) * 


 

 

강호숙 박사, ‘개혁교회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 발표

 

2015년 5월 11일 기사

 

“여성을 제한, 배제, 비하, 희롱하는 성차별적 설교가 아닌 여성을 하나님의 딸로서 존중해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 보수교단 안에서 남녀종속이라는 성(性)의 갑을(甲乙) 구도가 아니라 남녀가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맛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파트너로 세워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복음적 설교가 강단에 넘쳐나야 한다.”

 


강호숙 박사(총신대, 실천신학)는 “주님의 교회는 남성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여성을 위한, 그리고 여성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한 분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친밀함과 개방, 그리고 거룩한 교제가 있는 공동체”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남성과 여성은 인간실존과 전인차원에서 상호보완적 의미와 동일한 목적을 지닌 동료이지 이웃으로 여기며 공동체 안에서 누추하고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대신에 남녀모두를 존중하는 감사의 언어가 넘쳐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는 “하지만 보수교단 내에서는 성차별적 설교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며 “성차별적 설교라는 것은 남성본위의 성경해석으로 여성을 ‘차이’가 아닌 ‘차별’로 제한, 배제, 비하, 희롱하면서 성적굴욕감이나 수치감을 유발하는 설교”라고 설명했다.

 

특히 “성차별적 설교는 여성에겐 복음이 아니라 독음(毒音)이며 폭력”이라며 “여성으로 하여금 원망과 공포, 수치심, 우울, 분노, 박탈감, 죄의식, 억울함, 적개심을 갖게 할 수 있고, 성적 자아가 강한 여성의 경우 성차별에 환멸을 느껴 신앙을 포기하거나 영적 패닉상태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타락의 형별로 인해 남성에게 종속되고 차별받아 온 여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본래의 존귀함과 독특함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로서 세워준 복음”이라며 “복음적 설교는 지향되고, 성차별적 설교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교단 내에서는 어떤 형식과 유형으로 성차별 설교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강호숙 박사는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가 지난 5월 9일 개최한 ‘제29회 정기학술대회’에서 ‘개혁교회 내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그리스도의 복음과 성차별적 설교에 나타난 여성관의 비교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자유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강 박사는 자신의 연구논문에서 예장합동, 통합, 고신, 대신, 개혁정통을 보수교단으로 지칭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강호숙 박사의 발표 논문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 성차별적 설교의 기준과 유형

첫째, 성역할분업적 설교다. 여성차별로서 인정한 법의 판결사유 중 단연 1위는 성별에 따라 기질, 역할, 능력이 다르다고 보는 ‘성역할분업관’이다.

따라서 성역할분업적 설교는 “남자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식의 성에 대한 남성본위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더 나아가 잘못된 신념으로 여성의 성역할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성역할분업적 설교는 여성의 존재적 의미와 가치, 자아실현과 같은 인간됨의 문제를 축소하거나 부인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반영하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는 그저 애 잘낳고 음식 잘하면 된다 △여자의 할 일은 다만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야 △여자가 집에서 도대체 뭐하는 거야? △여자는 자고로 다소곳해야 돼 △여자가 똑똑하면 밥맛이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여성을 배제하거나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설교다. 성경에서 남성인물을 설교할 때, 남녀모두를 위한 신앙적 모델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설교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세벨’이나 ‘창녀’, ‘보디발의 아내’와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의 여성들을 설교하면서 모든 여성에게 적용해 “보디발의 아내처럼 순진한 남자를 유혹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

셋째, 여성비하적 설교다. 여성을 폄하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언어적 행위들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기저귀차고 어디 강단에 올라와? △여자가 뭘 알아? △어디서 여자 주제에 △여자는 믿을게 못돼 △여자는 머리가 나빠서 예쁘다고 하면 다 좋아해 △여자가 재수없어 △무식하고 싸가지 없는 여편네 △여자는 말 많은 존재라서 전도하며 떠들면 돼 △거지같은 여자 만나 망하는 남자 많이 봤어 △항상 여자들이 문제야 △여자가 죄가 많아 △여자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등이다.

넷째, 성희롱적 설교다. 여성에게 성적인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주는 설교를 말한다. 여기엔 성적 표현이나 음란한 농담도 속한다.

예를 든다면 △교회에 짦은 치마 입고 오지 말라 △여름만 되면 여자들이 옷을 못벗어 환장한다 △치마는 짧아져 보일락 말락하면서도 가슴은 안보여주더라 △쭉쭉 빵빵한 몸매는 되어야지 △남편이 성관계 요구하면 무조건 응해라 등 성적발언이나 신체에 대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는 발언 등이다.

 

 

# 성차별적 설교의 교회사적 원인과 사회문화적 요인

성차별적 설교에 대한 교회사적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남성 교부들과 남성 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여성관이다. 교회사에서 남성 교부들과 남성 신학자들의 여성에 대한 발언을 살펴보면, 터툴리안은 “여성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며 … 당신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다”고 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남자는 여자보다 더 털이 많고 따뜻한 피를 갖고 있어서 더욱 완벽하고 성숙하다”고 했다.

또한 기독교의 성자라고 불린 어거스틴은 “여성 자체를 놓고 볼 때,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오직 남성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여성은 불완전하고 형편없는 존재”라고 했고, 킹제임스는 “여성이나 여우를 가르치는 것은 더욱 교활하게 만들 뿐”이라고 했다.

이처럼 남성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봤으며, 심지어 여성들에게 아담의 죄책까지도 전가시키는 부정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둘째, 남성중심의 성경해석과 시대적용의 오류다. 남성 교부들과 남성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전제된 해석이다.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의 부활 시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여성의 이해력이 둔해서이며, 그리스도가 남성으로 오신 것은 구속자가 종속적인 여자의 위치로는 감당할수 없고, 남성이 더 강하고 완전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어거스틴은 “하와는 꼬임에 넘어간 첫 번째 사람이며 남성을 속인 책임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특히 오늘날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계시적, 구원적, 보편적 진리의 규범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문화적인 상황 가운데 가부장적 요소들이 들어있음을 분별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루터와 칼빈은 디나의 강간사건(창 34장)과 다말의 강간사건(삼하 13장)을 해석하면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전해 관심 없이, 오히려 딸(여성들)의 행동이 야곱과 다윗의 명예를 실추시켰음에 집중해 해석했다.

낮고 눌린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간과한 채, 남성본위의 성경해석을 비판과 수정도 없이 전통적 여성관으로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시대적용의 오류다.

셋째, 성차별적 제도를 지지하는 남성위주의 교회담론이다. 2천 년의 교회사를 보면, 성(聖)과 속(俗)은 철저히 성(性)의 구분에 달려 있었다. 즉, 성(聖)은 남성의 영역이고, 속(俗)은 여성의 영역으로 나눠 남성만이 교회의 지도권을 취해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모든 믿는 자가 차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롬 3:22), 구약의 정결법(레 12장)을 여전히 ‘여성은 부정하다’로 해석해 여성이 누려야 할 복음적 은혜와 사명을 제한하는 것은 주님의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남성 목회자들은 ‘성직자’라는 직분을 독점하면서 신학과 목회, 설교와 교육을 통해 남성중심의 교회담론을 형성해왔다.

 

 

성차별적 설교는 사회문화적인 원인도 크게 작용한다.

언어를 주도한 권력자로서의 남성들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무수한 단어 속에 여성에 대한 경멸과 욕설의 거대한 언어망을 구축해 여성을 얕보고 희롱해왔다. 따라서 사실 남성이 언어의 지배권을 갖고 이천여 년 동안 해온 설교 역시도 ‘차별 언어’, ‘폭력 언어’, ‘배제의 언어’가 되어왔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의 도구화’도 그렇다. 여성을 종속시켜 기능적인 존재로 만들어왔다. 남성의 주도권은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아 여성들을 남성들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켜왔다.

여성의 도구화는 산업혁명 후, 남성 엘리트주의와 근세 합리주의와 맞물리면서 여성의 인격적 가치와 직관적 가치를 무시하고, 종속된 타자로 취급해왔다. 소비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얼짱’, ‘몸짱’ 등 여성의 외모관리, 몸관리의 강조는 철저히 남성의 시선과 권력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여성을 희생량’으로 삼기도 했다.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남성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인간타락의 주범을 여성으로 몰아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 이러한 여성혐오나 여성기피와 같은 중세의 부정적 여성관이 극에 달해 발생한 사건이 바로 ‘마녀사냥’이다.

종교개혁 시대에서도 학식있는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이 남성들의 자존심을 위협하자 결국 ‘능변의 여인은 정숙하지 못하다’는 어처구니없는 평판을 만들어냈다.

또한 19세기 중엽 구한말에 남성의 예속물에 불과했던 한국 여성의 위치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다. 특히 칠거지악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첩을 시기하거나, 도둑질 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음탕하거나, 부모에게 불순종하거나, 말이 많으면 쫓아내 남성들의 과욕과 잘못을 여성에게 전가시켜 가부장제를 확고히 하는 기제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성차별적 설교가 성경적인가?

보수교단인 합동의 일부 남성 교수들은 바울의 여성관련 본문에 대한 해석에서 남녀관계는 ‘존재론적 평등, 기능적 종속’이라는 신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성차별적 설교가 성경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존재적 평등, 기능적 종속’이라는 말은 진위여부를 따지는 논리학으로 볼 때, 타당하지 않은 명제다. 인격적 존재인 남녀를 존재와 기능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녀는 불평등하다’라는 은폐된 결론과 같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여성은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과연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진리여야 하며,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절대담론(골 1:28)이다.

 

 

최갑종 교수(백석대)는 바울의 여성관련 본문에 대해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의 여성도들 중에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거나 곡해해 남녀 구분과 남편과 아내의 질서까지 부정해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여성들에게 주는 바울의 특별교훈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우리가 바울서신을 해석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의 원리와 정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른다는 해석원리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따라 동일한 믿음을 갖고, 남녀평등을 지향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문제를 ‘자유’와 ‘덕’의 원리로 해결했다. 바울은 때때로 ‘덕’을 위해 성도 개개인의 ‘자유’는 제한되며, 일반원칙은 특수한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와 정신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관습’이라는 임시적 논리를 세우는 것은 교회의 질서와 경건을 유지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장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즉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라는 언급과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 10:31)는 일반적 원칙을 제시하면서 ‘덕’을 중시하고 있다.

‘자유’와 ‘덕’의 원리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성만찬의 문제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로 여성들도 남성과 차별 없이 예언과 방언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음에도 예배시에 소란스런 상황을 야기한 예언하는 자들과 방언하는 자들에게 침묵을 요구했고, 또 일부 소란한 여성들에게도 교회의 질서와 덕을 위해 율법이라는 관섭을 제시하면서 ‘조용히 하라’고 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성차별적 설교가 여성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

남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자라는 성별분업적 목회담론이 고착되다보니 교회 여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석하며 실천하는 주체적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목회자의 설교를 거의 하나님 말씀으로 맹신하여 부종하는 경향이 짙다.

결국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여성으로서 ‘여성됨’을 인식하는 문제의식이나 고뇌조차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으로써 정죄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성 설교자들의 성차별적 성향이 오히려 성적 욕망을 채우는 ‘덫’으로 작동돼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이라는 비윤리적인 문제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성차별적 설교는 여성이라는 것에 대한 원망과 공포, 수치심, 우울, 분노, 박탈감, 죄의식, 억울함, 적개심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성적 자아가 강한 여성은 성차별에 환멸을 느껴 신앙을 포기하거나 영적 패닉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사회적 증상으로는 부부갈등, 자녀교육과 직장생활의 어려움, 사회적 고립, 학습된 무기력 등이 있을 수 있다.

극단은 독단을 낳고, 독단은 차별과 폭력을 낳게 된다. 남성이 지나치게 권위를 갖고 행하는 성차별적 설교는 여성에게는 복음이 아니라 독음이며 폭력이다.

남녀로 이루어진 교회공동체에서 윤리적 모델은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를 서로 인정하며, 다른 성의 낯설음과 다름을 존중하는 남녀 간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전인적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인간성 실현과 주님의 복음의 담지자로서, 그리고 기독교 성윤리 차원을 위해서라도 성차별적 설교는 지양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의 복음은 ‘남녀 평등’이 핵심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구적 원리이므로 복음에 제시된 인간관계 원칙 역시 만고불변의 중심원리가 된다.

주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남성의 머리됨’의 질서보다 더 우선하는 복음적인 원리다. ‘남녀연합’ 또는 ‘남녀평화’는 ‘남녀차별’ 또는 ‘남녀분리’보다 더 우선하는 복음적 원리다. 여성의 복음전파 사명은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보다 더 근원적인 제자도다. ‘제자도’는 권위나 직분보다 사명과 역할이 더 우선한다.

무엇보다 여성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타락의 형별로 인해 남성에게 종속되고 차별받아 온 여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본래의 존귀함과 독특함을 지닌 인격적인 존재로서 세워준 복음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바라는 ‘복음적 설교’는 여성을 제한, 베재, 비하, 희롱하는 성차별적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딸로서 존중해주는 설교다. ‘주 안에서 하나됨’을 맛보게 하는 설교이며, 여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를 아는 냄새’(고후 2:14)를 발하도록 믿음, 사랑, 소망을 주는 설교다.

보수교단 안에서 남녀종속이라는 성의 갑을(甲乙) 구도가 아니라 남녀가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맛보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파트너로 세워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복음적 설교가 말씀의 강단에 넘쳐나기를 희망한다.

 


<Copyright데오스앤로고스 / 무단 복제 및 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