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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우주론’과 ‘신론’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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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과 신학의 대화 / 김기석 교수(성공회대, 신학과)

 

2015년 3월 17일 기사
 
“우주가 수학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은 수학에 도통하신 분이다. 이 우주에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반영하는 보다 심오한 의미의) 합리성이 깃들어 있고, 그것을 부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것이다.”

“우주론과 신론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류는 각 문화권마다 나름대로의 우주론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신에 대한 관념과 분리불가능하다.”

 


성공회대 과학생태신학연구소가 지난 16일 오후 4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완성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 자리에서 발제자로 나선 김기석 교수(성공회대)의 말이다.

김기석 교수는 “우주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관찰하면 할수록 우주의 광대함과 복잡성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된다”며 “이는 동시에 우주를 대하는 인간이 성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우주적 영성’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겸허함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함께 그려보는 우주 이야기’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심포지엄에서 동 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김기석 교수는 인사말을 통해 “올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지 꼭 100년이 되는 해”라며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후, 10년 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그는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이고,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으로써 합리적인 과학적 사고와 감성적인 종교적 영성의 조화와 상호보완성을 강조한 과학자였다”고 평가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이 동일하다는 현상에 착안하여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획기적인 이론으로, 이는 뉴턴 이래 300년 간 지속된 기존의 우주론을 전복시켰으며, 정적 우주와 동적 우주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고, 오늘날 현대과학의 표준이론인 빅뱅우주론을 정립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김 교수는 “우주는 그 장구한 역사와 광활함으로 우리를 압도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한낱 티끌보다도 작은 존재인 인간이 이 엄청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며 “하지만 인간은 종종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마치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오만한 행동을 일삼으며 자연 혹은 창조질서를 파괴하여 지구생태계가 신음하고 있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우주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주 앞에 겸허한 태도와 진리탐구에 대한 열정을 지닌 우주적 영성을 일깨워보고자 심포지엄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서울대 명예교수 장회익 박사가 ‘우주 이야기에 담길 내용과 의미’라는 제목으로 주제강연을 진행했으며,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이석영 교수는 ‘일반상대성이론 100년, 우주론은 어디까지 왔나?’를 주제로, 김기석 교수는 ‘우주론과 신학의 대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한편, 아래는 김기석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김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일부 정리한 것이다.

 

 

# 우주론과 신론

구약성서에 묘사된 우주론은 유일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로서 우주이다(창 1~2장). 온 세계를 만들고 생명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하고 독창적 신앙으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구약성서 곳곳에 묘사된 세계의 구조에 대한 설명은 바빌론 제국에서 유행한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적 우주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근동지방의 우주론은 땅의 기둥은 바다 깊이 박혀 있고 신이 정한 지경에 바닷물이 한정되며 하늘에는 궁창이 있어 해와 달과 별들이 박혀있고 운행하며 궁창 너머에는 물이 차있어 그 궁창의 창문을 열면 비와 눈이 쏟아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바빌론 창조설화와 구약의 창세기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세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빌론의 창조설화에 따르면 하늘에서 벌어진 신들 간의 전쟁과 혼돈을 이겨낸 젊은 신 마루둑이 티아마트와 압수 등 다른 신들을 죽여 그 시체를 펼쳐놓음으로써 이 세계가 탄생하였다고 전한다. 그 신들의 버려진 몸 덩어리들이 산과 언덕이 되고 핏줄을 꺼내 놓으니 강이 되었고 피가 흘러 바다가 되었으며, 사람은 그 신들의 몸 속에서 마치 구더기처럼 생겨났으며 따라서 인간은 그 신들을 섬겨야하는 의무를 지녔다고 전하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구약의 창조설화는 인격신 하나님의 “빛이 생겨라!”라는 말씀에 의해 혼돈, 혹은 무로부터 이 세상이 시작되었고, 그 뒤로 6일 간에 걸쳐 각각 말씀을 통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차례대로 지어내는 모습을 상당히 조직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매 번 창조행위를 마칠 때마다 “보기에 참 좋았다”는 감탄은 이 세계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보기 좋고 만족스러운 세계 속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듦으로써 창조를 완성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이 결국 동일하다는 것과 인간은 신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계급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천차만별이었던 시대, 특히 바빌론 제국에 끌려간 노예로서 거의 아무런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이러한 고백은 매우 혁명적 발상이며 놀라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적 우주를 만든 구약성서의 창조주는 오직 말씀으로만 이 세계를 지어내는 전능하신 조물주의 모습이다. 한편 창세기 2장 5절부터 나오는 또 다른 창조 이야기(야훼 문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진흙을 빚어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토기장이’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다.

고대근동 지방에서 유래한 구약성서의 신화적 우주론을 잇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이다. 고대 점성술과 천문학을 집대성한 그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우주론을 완성하였다. 그는 천체의 운행을 천구(Heavenly Sphere)들의 회전으로 설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있어서 달과 태양, 다섯 행성, 그리고 항성들이 속한 여덟 개의 천구들의 운행을 설명한 것까지는 비록 당시의 한계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분명 관측 가능한 천체의 운동을 기술한 과학적 우주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우주론은 기독교의 세계관과 결합하여 여덟 번째 천구 너머에 천사들이 머무르는 원동천, 그리고 불변의 제 5원소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장소인 열 번째 천구까지 추가됨으로써, 종교적 관념에 의해 변형된 우주론이 되고 말았다. 이 우주론이 지닌 두 가지 중요한 결함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 기반하여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위치시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운동의 완전성이라는 관념에 기반하여 모든 천체의 운동은 반드시 원운동이라는 가정을 세운 것이다. 이 두 가지 결함으로 인해 이 우주론은 계속 수정을 필요로 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가 크게 원운동을 하면서 보조적인 작은 원운동을 한다는 개념을 도입하여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우주론에 상응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습은 피조세계 밖에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초월신론이다. 하나님은 저 멀리 우주 바깥의 신성한 장소에 머물러 계시면서 천사들을 통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이 우주론은 세계가 지옥계와 지상계와 천상계에 대한 로 나뉘어져 있으며, 성서에 가끔 나오는 하늘나라와 지옥이 이 우주의 공간 어딘가에 실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갈릴레이의 천체 관측, 그리고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이 등장하기까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천년 이상 서구인들의 생각을 지배해온 아주 강력한 우주론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우주론의 과학적 효력 및 종교적 권위가 상실된 지 수 백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종종 대중들에게 매력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 뉴턴 시대 이후 300년이 지나 아인슈타인이 등장했고, 또 수십 년이 지나 빅뱅우주론이 정립된 20세기 후반에 개봉된 ‘사랑과 영혼’이라는 할리우드 영화는 “악인의 영혼은 죽어서 지하세계로 끌려가고 선인의 영혼은 천사의 호위를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고색창연한 도식을 영상화하여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이 우리 인간에게 정서적으로 제일 편안하고 거주하고 싶은 세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 상대성이론과 빅뱅우주론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한지 10년 후 아인슈타인은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착상에서 출발하여,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곡률을 갖는다”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상대성이론은 곧 뒤이어 정립된 양자역학과 더불어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이 되었고, 20세기 내내 치열하게 전개된 새로운 우주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이 우주(시공간, space-time)는 평탄하지 않으며 중력에 의해 휜다는 것이다.

시공이 중력에 의해 곡률을 가진다는 혁명적인 생각은 우리의 우주상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는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적인 우주의 모델에 관한 믿음은 워낙 강해서 아인슈타인조차도 정적인 우주 모델상을 유지하기 위해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라는 것을 그의 방정식에 도입하는 타협을 하였다.

일반상대성이론은 그 자체로 우주가 빅뱅의 특이점을 가지며, 또한 마침내 전 우주가 빅 크런치라 불리는 한 점으로 붕괴하든지 아니면 지역 단위로 블랙홀로 붕괴하든지 아무튼 종말을 가질 것임을 예견함에도 불구하고, 팽창하는 우주 모델은 알렉산더 프리드만의 예측과 에드윈 허블의 발견이 있기까지는 소개되지 않았다. 프리드만은 상대성 이론 자체로부터 팽창에 대하여 닫힌 우주, 열린 우주, 그리고 임계 팽창률을 유지하는 우주 등 세 가지 모델을 도출해 내었다.

“이 세 가지 우주 모델의 방정식은 모두 100억 년 전 내지 200억 년 전 사이의 과거에 이웃한 은하의 거리가 제로가 되는 즉, 전 우주가 한 점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해(solution)를 보여 준다. 우리가 오늘날 빅뱅이라 부르는 그 시점은 우주의 밀도와 시공의 곡률이 무한대였을 것이다.”

첫째 모델은 팽창하던 우주가 중력으로 인하여 일정한 한계에 이르러 팽창을 멈추고 재수축하는 우주이다. 두 번째 모델은 급속한 팽창률이 중력의 작용을 넘어서기 때문에 영원히 팽창해 나가는 우주이다. 세 번째 모델은 중력과 팽창률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 아슬아슬한 임계팽창률로 팽창해 나가는 우주이다.

허블은 1929년에 우주의 모든 방향의 은하로부터 오는 빛에서 ‘적색편이(red shift)’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 현상이 지시하는 바는 도플러 효과에 의해 분석해보면 모든 은하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도플러 효과란 파동원이 관측자로부터 멀어질 때는 파장이 길어지고, 가까워질 때는 파장이 짧아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파장의 치우침 정도를 분석하면 파동원의 상대속도를 알아낼 수 있다. 허블의 관측에 따르면 모든 은하들로부터 도달하는 광원이 붉은색 쪽으로 편이 되었고, 그 정도는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편이가 심하였다. 이는 모든 은하들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빅뱅이론을 반박하려는 몇 가지의 시도가 있었는데, ‘정상상태 이론’ 이나 ‘진동(반복적 수축팽창) 우주론’(Oscillating Cosmos Theory)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빅뱅이론에서 예견되었던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 현상이 1965년에 우연히 두 과학자(Arno Penzias, Robert Wilson)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우주배경복사는 빅뱅 당시에 전 방향으로 폭발된 에너지(물질)를 반영하며, 그것이 지금은 절대온도에 가까운 복사선으로 식어져 전 우주공간에 떠돌아다니는 것으로서 빅뱅우주론의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스티븐 호킹은 펜로즈와 함께 1970년에 우주는 빅뱅의 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빅뱅우주론을 표준 이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빅뱅우주론은 과거 한 시점에 우주의 시작이 있다는 점 때문에 20세기 과학에 있어 가장 큰 지적 충격을 몰고 왔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이어 또다시 몇 세기 만에 세계관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과거 뉴턴 물리학에 의해서 우주의 모든 운동이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폐기해야 함을 뜻했다.

이 우주가 하나의 정교한 기계처럼 무한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지금 모습 그대로 존속할 것이라는 뉴턴-데카르트 세계관의 근본적인 전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빅뱅우주론은 현대물리학의 두 주축 이론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성립되었으며, 엄밀한 이론적 검증과 관측 데이터의 검토를 통하여 표준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학은 항상 진보하며 그에 따라 과학 이론 역시 늘 수정되어간다. 그런 점에서 빅뱅이론이 과학적 우주론에 있어 최후의 완벽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앞으로 계속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질 것이지만 우주론적 모델로서 빅뱅우주론의 틀은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빅뱅우주론이 불러온 세계관의 지적 혁명은 기독교 신학의 창조신앙과 관련하여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빅뱅우주론이 이 우주가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시작하는 순간(특이점)을 갖고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 시작의 순간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신의 창조의 순간, 나아가 전통적인 교리인 ‘무로부터의 창조’의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빅뱅우주론을 접하면서 많은 신앙인들과 신학자들이 바라는 기대일 것이다.

# 어거스틴의 시간관과 하나님의 절대성

어거스틴은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을 보다 정교하게 정립한 신학자로 평가된다. 어거스틴은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성직자를 성가시게 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라는 퉁명스런 대답 대신에 “시간도 신이 창조한 우주의 한 특성이므로 창조 이전에는 시간을 비롯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간이 창조의 특성’이라는 말은 시간이 창조의 결과물이며, 창조의 주인인 하나님에게 종속된 성질을 갖는 것이지 그 스스로 독립적인, 혹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거스틴은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의 한 속성이며, 창조를 통해서 생겨났다고 사고하였다.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묻는 것은 의미없는 질문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량을 갖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현대 물리학을 총동원하여 성립한 빅뱅우주론은 이 우주가 과거 어느 시간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한 특이점으로부터 시간과 공간(space-time)이 생겨났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시간의 비절대성에 대한 성찰은 현대 물리학의 시간의 상대성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묵상한 시간의 창조에 대한 의존성은, 큰 틀에서 볼 때 오늘날 빅뱅우주론의 모델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힘겹게 올라선 최정상의 봉우리에 이미 오래 전에 신학자들은 앉아 있었다는 재스트로우의 우화가 떠오른다. 어거스틴은 분명코 산봉우리 정상에 앉아 놀다가 과학자를 맞이한 신학자 중에서도 우두머리일 것이리라.

 

 

시간이 절대값을 갖지 않으며 속도에 따라 변화하는 물리량을 갖는다는 사고는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통해서 입증된 것이며, 이는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뉴턴 물리학의 근저를 뒤흔든 혁명적으로 사고이다. 어떻게 어거스틴은 거의 이천년을 앞서 현대의 천재 물리학자들이 치열한 과학적 사고를 통해서나 도달 가능했던 개념에 그토록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어거스틴의 놀라운 성찰은 물론 자연과학적 접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신학적 직관을 통해서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어거스틴은 절대성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서 절대성이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으며 그 외의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상대적이고, 의존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느끼는 ‘시간’조차도 상대적, 의존적 범주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곧 세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물로서 그 존재성은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의존적이라는 창조신앙의 요점과 부응되는 신학적 성찰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성찰을 통해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이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사색의 결과로 유추된 ‘무로부터의 창조’가 오늘날 빅뱅우주론을 통해서 다시금 각광받게 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과학과 신앙은 어떤 시대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반목하고 등을 돌리지만, 결국 양자는 완전히 갈라설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이유는 과학이나 종교 양자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향한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로부터의 창조’만이 기독교 창조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더불어 ‘계속된 창조’(creatio continua)에 대한 신앙도 기독교 창조신앙의 중요한 요소이다. ‘계속된 창조’ 사상 역시 시편 104편을 비롯한 여러 성서적 전거들을 바탕하고 있으며, 성령의 활동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특히 과정신학자들은 진화론적인 관점에 바탕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정신학적 관점에 따르면 신은 세계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참여하는 존재이다. 창조는 세계에 내재하는 모든 존재가 원초적 상태에서 최종적 상태로 변화, 실현해가도록 이끌어가는 창조적 잠재성(creative potentialities)으로 표현된다.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은 역사적 신앙고백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사색을 통해 정식화된 교리로서, 과정신학에 의해 그 신학적 효용성을 도전 받았으나 오늘날 빅뱅우주론에 의해 재조명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이 ‘무로부터의 창조’가 과학적 우주론에 의해 지지 받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일 것이다. 과거 신학이 ‘틈새의 신’(God of gap) 전략에 의해 논증한 신학적 주장들이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추가되어 과학이론이 수정될 때마다 위기를 겪었던 경험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빅뱅우주론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함축하는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빅뱅이 태초의 순간(특이점, t=0)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학적 토론은 창조신앙의 핵심적 메시지, 즉 ‘이 세계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 ‘창조세계의 선함과 질서와 법칙의 일관성에 대한 긍정’,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창조와 축복’이라는 맥락 속에서 성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아인슈타인과 우주론에 대한 우리의 자세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의 실마리가 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순간을 가리켜,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착상”이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고실험을 통해 이 착상을 보다 분명하게 가다듬었고, 결국 수학(기하학)을 사용하여 이론을 정식화했다.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반상대성 이론은 거시적 규모에서 우주의 구조를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전개된 사고 실험의 과정과, 마침내 수학으로 표현되는 우주 존재방식의 상관관계에 주목해보면, 우리는 이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가 가장 관념적 언어인 수학을 통해 이해가능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를 두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가장 불가해한 점은 이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양자역학이 물질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난감한 질문들은 “이해 가능한 우주”에 있어 “이해가 가능하다”는 의미, 즉 합리성에 대한 의미를 보다 심오하게 해석해야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관념과 잘 부합되는 수학과 이를 사용한 아름다운 방정식으로 우주의 기원과 구조가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주의 특성과 형이상학적 관념 내지는 가치의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단순하게 말해 이 우주가 수학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은 수학에 도통하신 분이시다. 이 우주에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반영하는 보다 심오한 의미의) 합리성이 깃들어 있고, 그것을 부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관찰하면 할수록 우주의 광대함과 복잡성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이는 동시에 우주를 대하는 인간이 성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우주적 영성’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겸허함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남용,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품어야할 우주적 영성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사의 과학자였던 칼 세이건은 인간이 우주론을 배우면서 보다 겸허해진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의 제안으로 보이저 1호가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이름과 같이 겨우 찾아볼 수 있는 어둠 속에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지구의 크기는 0.12화소에 불과하며, 작은 점으로 보인다. 세이건은 이 사진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에는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와 창조주 하나님을 궁구하는 신학자가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며, 인간의 궁극적 질문으로서 우주론이 상실된 이 시대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음미해야할 깨달음이 담겼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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