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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사회•환경과 신학

한반도 평화통일,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by 데오스앤로고스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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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연구(13)

 

 

한국기독교학회, ‘한반도 평화통일과 한국 교회’ 심포지엄 개최

 

2014년 5월 23일 기사

 


한국기독교학회(회장:유석성 박사, 서울신대 총장)가 지난 23일 오후 1시 서울신대 존토마스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과 한국 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평화통일을 위해 한국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원규 교수를 비롯해 허호익 교수, 주도홍 교수, 박종화 목사 등이 △한국 교회의 절망과 희망 △남남갈등과 통합적 통일신학의 모색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역할 △독일 분단시절 세계루터대회를 통해 얻는 지혜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날 발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한국 교회의 절망과 희망 / 이원규 교수(실천신대)

한국 교회가 지금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없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회자가 목회자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평화통일을 말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먼저 변화하고 개혁된 상황에서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면 교회나 사회나 그에 합당한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나 영적으로 쇠락하고 있는 요인을 분석하고, 한국 교회가 거듭나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종교사회학적으로 규명해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가 정체되고 있는 것은 교회 자체가 사회적 공신력을 잃고 있는 것에도 크게 기인하고 있다. 1960년, 1970년대만 해도 한국 교회의 사회적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바로 이 시기는 한국 교회의 전성기였다. 보수진영에서는 복음적이면서도 성령운동적 신앙운동을 전개해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면서 교회를 부흥시켰고, 진보진영에서는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반 기독교 운동이 확산됐다. 한국 교회가 사회적 존경과 신뢰를 잃게 된 것은 무엇보다 교회가 변질됐기 때문이다. 일종의 성장의 부작용이다. 급성장하면서 너무 자만했고, 풍요로워지면서 세속화됐다. 성공과 성장에 도취돼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렸다.

외국 학자인 존 스톤과 맨드릭은 한국 교회의 네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첫째,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척도라는 믿음을 가진 영적 자만심, 둘째, 교리적, 지역적, 조직적으로 분열된 것, 셋째, 권위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교회의 지도력, 넷째, 윤리적 가르침의 소홀 등이다.

한국 교회의 당면과제는 세속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결정적 과제는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영성은 신앙의 본질이며, 교회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성의 가장 큰 걸림돌, 세속화의 가장 큰 문제는 맘모니즘이다. 한국 교회는 맘모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교회의 급성장은 경제적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성장과 성공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물질가치, 경제가치를 최고의 덕으로 보고, 이것을 절대시하는 맘모니즘의 덫에 빠지게 만들었다.

헌금은 복을 받는 수단이 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헌금을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의 척도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헌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통해 신앙의 크고 작음을 판단하고 있다. 맘모니즘이 교회를 상업주의에 물들게 만들고 있다.

 

 

한국 교회 맘모니즘의 극치는 무엇보다 성직매매다. 교단장 및 연합단체장 선거는 온통 돈잔치로 물들어 있다. 예배당을 사고파는 행위도 일종의 성직매매다. 목회자가 교회를 떠나면서 프리미엄을 후임자에게 받기도 하고, 교회가 후임자를 구할 때, 교회 빚을 갚아 줄 수 있는 목사를 조건으로 내걸기도 한다. 무인가 신학교에서 돈을 받고 날림으로 목사직을 주는 행위도 성직매매의 다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가장 심각한 세속화 현상, 맘모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참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비움의 영성, 바름의 영성, 나눔의 영성을 회복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첫째, ‘비움의 영성’은 가난함의 영성, 낮아짐의 영성이다. 성공에 대한 우월감과 성장에 대한 자만심을 버리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 세상에서의 부귀, 권세, 명예를 내려놓아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종의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비움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둘째, ‘바름의 영성’이다. 목회자와 교인의 삶이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칭송받을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바르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잇어야 교회와 목회자, 교인은 존경받을 수 있다.

셋째, ‘나눔의 영성’이다. 이것은 섬김의 영성, 돌봄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된다. 물론 그동안 한국 교회는 사회봉사와 구제에 앞서왔고, 선한 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충분하지 않다. 물적, 인적, 시설 지원을 더욱 내려놓아야 한다. 아직도 더욱 돌보고 섬겨야 할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질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희망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

이제 한국 교회는 변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달라져야 한다. 그 변화의 핵심은 비움의 영성, 바름의 영성, 나눔의 영성이라는 참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참된 영성만이 한국 교회의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다.

 

 

# 남남갈등과 통합적 통일신학의 모색 / 허호익 교수(대전신대)

한국 교회는 6.25 전쟁 전후로 북한 공산당이 기독교에 가한 적대의식의 체험들로 인해 ‘체험적 반공주의’ 일변도로 경직해 버렸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지던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전 지역에서 기독교가 초토화됐으며, 소위 인민재판의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기독교인들이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북한을 향한 적대감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 공산정권으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은 기독교인들의 체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에서 벗어나 적대적 반공주의를 극복하고 치유와 화해를 위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공이념’도 극복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는 절대적일 수 없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원칙적 반공주의는 공산주의 그 자체보다 더 큰 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평화통일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것은 통합적 통일신학을 모색해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이념과 좌우합작의 삼균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남북 모두 분단이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이념으로 돌아가야 한다.

1941년 10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했다. 삼균주의 이념은 정치의 균등(참정권), 경제의 균등(수익권), 교육의 균등(수학권)으로 구성돼 있다. 삼균주의는 해방 이후 좌우노선 대립을 지양하고, 민족통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반공이념 극복과 좌우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통일을 하려면 통일에 대한 진정성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남북 간에 합의한 것이라도 제대로 지켜야 한다.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분단의 비용을 절감하고, 공생 공영을 위해 남북이 모두 ‘적대적 공생’을 포기하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좌우를 아우르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1995년 KNCC는 남북의 이념과 체제를 아우르고 양쪽을 서로 살리는 ‘함께 사는 공생적 통일’, 납북의 장점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해 단점은 지양하고, 극복해서 서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서로 배우며 닮는 수렴적 통일’, 새로운 가치와 문화, 새로운 사회 구조와 공동체를 창출해 내는 ‘새롭게 만드는 창조적 통일’을 골자로 하는 ‘평화와 희년의 통일선언’이라는 제3의 통일 이정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셋째, 삼통 확대를 통한 통합적 통일 기반 조성과 단계적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 통일이 대박이 되려면 통합적 통일의 기반을 우선 마련해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이 정례화되고,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고, 개선공단이 활성화되고, 각종 민간교류의 자원이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통일 이전에 군사적 긴장과 국지전적 도발을 차단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하루 속히 체결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합의가 쉽지 않겠지만 진정성을 갖고 연방제나 연합제의 합의를 통해 ‘낮은 단계의 통합’부터 이루어야 한다. 통일은 그 다음의 과제다. 그리고 이미 남한에 와 있는 북한 이탈 주민 26,000여 명이라도 잘 배려해 남한에 온 것을 잘 한 일로 여기도록 정책적인 지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살 길은 통일’이라고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통일에 관한 남남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통일 관련 실제적인 쟁점에 대한 국민의식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역할 /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교회는 정부가 아니다. 통일문제에 관한 한 사랑과 공의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NGO 중의 하나다. 정부 당국 간의 갈등과 대결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는 교회의 대북 상대는 북한 정부나 당이 아니라 ‘북한 백성’(인민)이라는 점이다. 각 사회체제의 상이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간 대 민간’의 교류협력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속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당국차원의 막힌 ‘담’을 헐어주는 화해와 소통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당국의 선한 정책을 뒷받침하는 협력적 지원과 동시에 적대적 정책에는 비판하며 고치게 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는 ‘화해의 사역’과 함께 ‘평화의 봉사’가 신학적, 교리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함께 몸담아야 할 공동기반이며 함께 추진해야 할 공동비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들은 ‘평화의 봉사’ 속에 이미 시작된 통일을 부분적으로나마 맛보고 나누는 일, 곧 인도주의 차원의 교류협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한다. 평화의 봉사의 또 하나의 영역은 탈복동포들의 생존권 보장과 자유화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의 평화통일 헌신을 민족적, 국가적 차원의 봉사로 제한할 수 없다. 교회 존립의 근거인 ‘선교와 복음화’를 통일열차에 실어야 한다. 선교와 복음화는 평화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통일한국의 미래는 통일된 나라의 한국 교회가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 복음화와 선교의 첨병이 되고 또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형적, 물리적 국력이나 등치에 있어서는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선교와 복음화를 중심한 ‘힘, 꿈, 인력, 비전’에 있어서는 한국 교회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앞서가는 선두주자 교회인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도 아직은 교회의 외형적, 물리적 모습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자기 혁신이다. 우리 자신의 현행 신학적 협소함, 교리적 폐쇄성, 교회의 대사회적인 실추된 모습 등을 근본적으로 개선 내지 갱신하지 않고서는 아시아 및 동북아의 복음화 및 선교는 그림 위의 떡일 수 있다.

통일을 앞두고, 통일을 위하여 한국 교회는 ‘평화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 현재의 분단세대는 분단 극복의 평화, 곧 치유하고 치유 받는 평화를 단계적으로 심어야 한다.

앞으로 이 나라를 걸머질 분단 이후의 세대에게는 고질적 분단의 아픔과 멍에에서 해방시켜 생산적이며 건설적인 화해와 평화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평화통일 및 선교와 복음화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공동으로 취해야 하는 ‘세대 간 화해와 협력’의 과제다.

 

 

# 독일 분단시절 세계루터대회를 통해 얻는 지혜 / 주도홍 교수(백석대)

1983년 동독 공산 치하에서 열린 ‘루터 출생 500주년 기념대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89년 동독은 무너졌다. 독일통일은 1990년 10월 찾아왔다. 이 대회가 어떻게 동독에서 열릴 수 있었는지 생각하며 한국 교회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루터 출생 500주년 기념대회를 위해 독일교회의 준비는 철저했고, 완벽할 정도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인원은 미국,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를 위시한 35개국에서 모여든 크리스천 사절단 20만 명을 선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 신앙적 국제대회를 위해 당사자인 동독정권, 동독교회가 주도권을 가져야했고, 아울러 서독교회, 서독정부의 적극적 참여와 재정적 도움이 있어야 했으며, 세계 교회의 뜨거운 호응과 참여가 요구됐다.

당시 동독정부는 몇 가지를 교회에 요청했다. 교회가 평화운동에 동참할 것, 정치적 문제에는 개입하지 말 것, 종교적 관심에 집중할 것, 철저하게 교회는 자체단속을 해 줄 것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루터야말로 가장 거대한 독일의 유산으로 500주년 루터대회는 사실 전 독일의 일이요, 경사임을 부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대회는 성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동독교회도 세 가지 면에서 함께 보조를 맞췄다. 국가 이익에 일치, 국가 정치에 협조, 다른 장애들이 발생하지 않는 가운데 기념대회를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분단시절에도 서독교회는 몇 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동독교회를 도왔다. 명목 있는 도움으로 상대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입각한 확고한 철학과 순수한 지원 원칙을 지켰다. 지원의 다양성과 대담성을 잊지 않았다. 서독정부의 법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결과로 서독교회는 동독 정권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루터 출생 500주년을 맞아 세계루터대회를 동독 정권의 동의하에 개최할 수 있었다. 공산국가에서 치러진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기념대회는 실로 놀라운 서독교회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독일교회는 이데올로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명령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바로 인식하고, 분단 하 성령이 주시는 인내와 사랑으로 어려운 시대 하나님이 주신 역사적 사명을 감당했다. ‘섬김의 신학’, ‘실천적 대화’, ‘성육신의 사랑’으로 특별한 유대관계를 동독과 분단 내에 유지했다.

정치를 뒤따라 다니지 않았고, 도리어 정치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독일교회였다. 정치가 막힐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화해의 복음으로 평화를 이끌어냈다. 5년 간의 실질적 준비를 한 후, 결국 루터500주년 기념대회를 통해 신앙적, 국제적 축제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빛으로 분단 독일에게 방향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한국 교회는 5가지 역할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성경적 통일관을 확보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길을 가야 한다. 분단 상황 하에 있는 한국 교회는 이데올로기와 복음의 관계 정립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복음은 하나님의 음성이며,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소리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하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일 때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다. 한국 교회는 이념을 치유하는 복음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 존경받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존경을 받을 때, 교회는 비로소 주의 일을 감당하게 된다. 훨씬 효과적으로 그 무언가를 감당할 수 있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지 않을 때, 사람들은 교회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고 따르며 존경하게 된다.

셋째, 사랑 그 자체로 소중하다. 교회의 사랑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 사랑을 통해 뭔가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북한선교를 전제로 한 북한사랑도 순수하지 않다. 신학적으로 교회가 사랑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지 더 이상 뭔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는 종교개혁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교회는 사랑하는 자로 나서는 것이다. 이미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빚을 되갚는 행위일 뿐이다.

넷째, 평화의 사도로 나서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십자가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상처 입은 치유자’, 화해자,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서야 한다. 원수 사랑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남북통일의 전제다. 교회가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한다면 통일 후 통합화 과정에 있어서 교회의 역기능은 불 보듯 뻔하다.

다섯째, 공공신학을 가져야 한다. 복음의 문화변혁 사명에서 볼 때, 정치를 바꾸는 교회여야 한다. 부패한 정치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를 이끈다는 말은 정치를 초월한다거나 또는 무시한다거나, 정치적 교회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치를 따라다니는 파당적 교회도 아니어야 한다. 정치가 벽에 부딪혀 남북관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교회가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추구해야 한다. 정치가 길을 잃었을 때, 또는 정치가 너무 정략적일 때 보다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북핵문제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을지라도 교회는 성경에 입각해 얼마든지 자신의 길을 당당히 갈 수 있어야 한다. “악을 악으로 갚게 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길은 예수님의 길이다. 이 길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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