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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을 성전이라 칭하는 포장된 탐욕, 어떻게 볼 것인가? 본문

진단!한국교회

예배당을 성전이라 칭하는 포장된 탐욕, 어떻게 볼 것인가?

데오스앤로고스 2016.01.07 18:17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영화 쿼바디스에 답하다> 제3차 포럼에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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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5  10: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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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연구원 느헤미야(원장:김형원 목사)가 지난 9월 14일(월) 오후 7시30분 느헤미야 세미나실에서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연중포럼:영화 <쿼바디스에 답하다>’의 세 번째 포럼을 진행했다. 이날 포럼은 ‘성전과 예배당-예배당 건축과 교회 본질의 훼손’을 주제로 진행됐다. 김동춘 박사(건물 교회론을 검토한다:교회의 본질과 현실), 조석민 박사(예배와 예배공간:경건의 표상인가? 포장된 탐욕인가?), 권연경 박사(성전 교회론의 실천적 함의), 유정훈 변호사(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하나님의 교회와 인간의 법) 등 발제자들의 주된 발표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주>

   
 
“건물로서의 교회는 인간 욕망의 투사물이자 사적 소유물이 되고 있다. 신앙의 수렴점을 건물 교회로 집중하는 것은 온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구현에 대한 전망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건물 교회의 ‘과잉’은 멈춰야 하며, 교회당 건물의 공공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김동춘

“예배당 건축은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으로서 행동하는 영역이니 누구나 그런 것처럼 건축법 및 기타 관련 법령을 지키면 된다. 예배당 건축을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일반 사회 구성원의 위치에 서면 상식에 근거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예배당 건축으로 교회 본질이 다치는 문제를 피할 수 있다.” /
유정훈

“예배란 단순히 예바당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 의식으로 나타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올바른 신학 없이는 개신교의 예배가 인간이 만든 그럴듯한 건축물 안에서 무속종교의 의식으로 전락하기 쉽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믿음은 예배에서 에배공간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
조석민

“성전에 대한 집착은 우상숭배적 경향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결정적인 복음적 통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치명적인 이단사설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경우 돈에 대한 욕망의 산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욕망의 지시를 따를 때, 우리는 영성의 외형에 집착한다.”/
권연경

<건물 교회론을 검토한다: 교회의 본질과 현실>
김동춘 교수(국제신대, 조직신학)


   
▲ 김동춘 교수
건물 교회의 존재 이유 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회집장소로서의 공간 필요성에 있다. 예배가 신앙생활의 가장 근간이라면 예배를 위한 공간은 없어서는 안된다. 예배당의 과잉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정기적으로 열리는 예배를 위한 건물은 필요하다.

물론 건물로서의 예배당이 회사나 카페, 음식점, 공장처럼 매일 사용되지 않고, 예배 없는 날이면 비어 있는 공간이 너무 많아 낭비적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회 건물을 갖지 않을 것을 교회의 방향과 목회철학으로 설정한 교회도 실제 교회 공간을 위한 임대비 지출이 상당히 크다는 것도 사실이다.

# 본질의 교회 대체하는 건물 교회

교회 건물인 예배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과잉’이다. 교회 건축, 건물 교회는 비판받고 있다. 그 이유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본질의 교회’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온갖 성물들이 채워진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 한 명도 없는 임대상가에 헌금으로 다양한 예배 기물들을 진열하고, 최고 수준의 인테리어가 되어 있더라도 교회는 아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없는 교회,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교회, 십자가의 은혜가 선포되고 세례가 시행되지 않는 곳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지니는 교회관의 치명적인 오류는 교회됨의 본질적 요소를 등한시하면서 교회 건물을 소유하면 마치 그 곳이 교회가 된다고 하는 착각이다. 화려한 외형을 갖춘 교회 건물이 교회의 본질을 대체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그 곳이 가정이든, 창고이든, 커피숍이든, 공공시설이든 길거리든 아무 상관 없이 교회가 된다.

# 건물 교회가 성전이라고?

한국 교회에 편만한 교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류와 왜곡은 예배당 건물의 ‘성전화’다. 교회당 건물을 성전시하는 사고는 일종의 한국 교회에 깊숙이 안착된 대중신학의 하나로서 예배당 자체를 천상의 성전으로 격상시켜 버렸다.

구약적 성전 개념을 신약의 교회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구약의 성전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 이전에 동물의 희생제물로 시행된 속죄의 장소였다. 성전은 속죄제사를 통해 인간과 하나님의 제의적 친교가 이루어지는 성별된 장소였다.

하지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와 화해 사역을 실행하심으로써 성전의 제사의식은 종결됐다.

따라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친다거나 강단을 ‘제단’으로 칭하거나 목사를 축복과 사죄의 중개자로 부각시키면서 레위지파로 특화하는 것은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신약적 관점에도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인사제주의’를 강조했던 종교개혁적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목회자들이 건물 교회를 ‘성전화’ 하는 것일까? 유독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교회당의 부속 기물들을 ‘성물’로 지칭하면서, 목회자의 제사장직(사제주의)만을 강화하는 이유는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숭배하도록 유도하는 타락한 목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한 헌신을 ‘보이는 건물’로 대체해 물질과 관심을 쏟게 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고, 교회성장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욕망의 투사물이자 사적 소유물이 된 건물 교회

건물 교회에 대한 집착은 ‘내 교회’를 소유하겠다는 사적 욕망의 표출이다. 내 집 한 채 소유하는 것을 인생의 최종목표로 삼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당을 건축하는 과정 자체가 교회를 위한 헌신의 척도가 되고, 결국 목회자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의 건물 교회에 대한 숭배의식은 보통 이상이다.

목회자들의 꿈꾸는 목회적 최종점이자 종착지는 건물 교회를 짓는 것이다. 한마디로 건물 교회는 목회적 성취감의 표현이며, 자기 욕망의 표현이다. 웅장한 교회 건물은 하나님 나라 확장의 표지가 아니라 목회자와 교인들의 자기만족과 욕망의 투영물이다.

건물 교회는 교회됨의 본질보다 교회의 외형적 규모와 가시적 성취에 집중하게 한다. 따라서 교회 건물의 규모가 목회자들의 목회 성공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하는가라는 ‘내용’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교회 건물을 사유화하는 사고에서 공유적 사고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회 건축의 과잉 열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의 왜곡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부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진보는 교회의 성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 안에서도 진행된다. 따라서 건물 교회가 확장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건물 교회가 수적으로 늘어난다 해도 교회가 국가와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내용적으로 구현해 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사건 속의 교회’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가시화되는 현실이다. 그리스도적 구조가 세상 속에 현재화하는 곳이다. 세계 현실이 되신 그리스도가 대리적으로 실존한 것처럼 교회 역시 타인을 위한 대리적 삶의 원리에 따라 책임적 존재로 실존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 차단막을 친 종교 조직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섬김의 도구일 때 의미가 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형체를 드러내는 교회는 건물 교회를 넘어서야 하며, 세상 속에 육화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제 건물 교회의 ‘과잉’은 멈춰야 한다. 한국 교회가 투자해야 할 분야는 건물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관, 사회정의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기독교연구소나 전문기관이다.

교회당 건물의 공공성도 고려해야 한다.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 교회 건물을 갖지 않기로 하고, 공공시설이나 빈 공간을 예배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실험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새로운 대안들이 희미하지만 저 밑바닥에서 움트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하나님의 교회와 인간의 법>
유정훈 변호사


   
▲ 유정훈 변호사
개신교 교회의 법적 성질은 ‘법인 아닌 사단’이고, 교회의 재산소유 관계는 교인들의 ‘총유’(總有)라는 것이 확립된 판례다.

여기서 총유라는 것은 법인 아닌 사단의 구성원이 집합체로서의 물건을 소유하는 경우를 의미하는데, 정관에 규정이 있으면 그에 따르고, 정관에 규정이 없으면 재산의 관리 및 처분은 구성원 총회 결의(과반수 결의)에 따르고, 구성원은 정관에 따라 재산을 사용, 수익할 수 있는 것이다.

예배당 건축의 경우,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이지만 형식 논리상 건축 결정 자체가 반드시 교인총회 결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배당 건축의 경우 교회재산을 담보로 제공해야 하므로 실제로는 교인총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적법하게 건축을 진행할 수 있는 사례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주식회사에서 이사회 또는 주주총회 결의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제대로 된 회사라면 이사회 또는 주주총회 결의를 하면서 의결권자에게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로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해서 의결을 받을 것인지, 이사회 의사록 또는 주주총회 의사록에는 무슨 내용을 기재할 것인지, 혹은 이에 따라 상법에 따른 이사의 책임이 발생될 여지는 없는지, 혹은 배임죄로 형사처벌 대상이 될 가능성이 없는지 등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한다.

하지만 예배당 건축에서 이러한 과정은 흔히 무시되고 생략된다.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과 관련해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는 말에서 예배당 건축이 교회 본질을 훼손하는 현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배당 건축은 회사의 사옥 건축과 다를 바 없는 결정이다. 그런데 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생각하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예배당 건축은 교회라 할지라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적 영역의 법칙에 따라 진행해야 하는데, 마치 종교의 영역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하거나 종교의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일반적인 사회 생활에서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일은 무시한 채, 하나님의 교회가 인간의 법을 가볍게 뛰어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예배당 건축의 대외적 법률관계는 간단하다. 그냥 법을 지키면 된다. 예배당 건축은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일반 사회 구성원으로서 행동하는 영역이니, 누구나 그런 것처럼 건축법 기타 관련 법령을 지키면 된다.

사랑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공공도로 지하 부분에 대해 점용허가를 받아 교회 건물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위법 또는 탈법 논란이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행위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말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배당 건축은 종교의 자유와는 무관한 영역이다. 이제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서 일반 사회 구성원과 같은 자리에 서야 한다. 그게 원칙이고, 문제해결에 이르는 방법이다.

예배당 건축을 ‘하나님의 일’이라 하지 말고 일반 사회 구성원의 위치에 서면 상식에 근거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예배당 건축으로 인해 교회 본질이 다치는 문제를 피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 위에 가시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이상 인간의 법과 함께, 인간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교회가 인간의 법을 초월하는 방식은 예컨대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 같은 방식이어야지, 지금처럼 인간의 법은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태도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인간의 법을 뛰어 넘으려고 하는 것, 종교 영역의 공적 영역에 대한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 본질을 해친다. 그것은 바로 성(聖)이 속(俗)의 우위에 선다는 잘못된 이원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는 반대 방향의 왜곡된 승리주의가 발현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예배와 예배공간:경건의 표상인가? 포장된 탐욕인가?>
조석민 교수(에스라성경대학원대, 신약학)

   
▲ 조석민 교수
초대형 교회 건축물의 출현과 함께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 한국 개신교의 위상은 땅에 떨어져가고 있으며, 참담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예배당들은 더욱 거대하고 웅장해지고 있으며, 내부는 화려하고 더욱 편리하게 꾸며지고 있으며, 최신식의 음향, 비디오 시설과 함께 매우 안락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한국 개신교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 성서에서 가르치는 예배 공간의 의미

성서에서 가르치는 예배 공간이란 어떤 의미인가? 고대근동에서 예배 공간은 신들의 현현 장소다. 사무엘 시대에 산당은 백성들의 통상적인 예배 공간이었다.

그러나 당시 예배 공간이었던 산당 파괴와 같은 명령은 히스기야와 요시아 왕 때 시행된다. 왕정 시대에 호세아와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상숭배의 공간이었던 산당을 맹렬히 비난한다.

솔로몬 성전 건축 이전에는 현실적으로 산당에서 제사가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전 건축 이후에도 혼합주의적인 종교행위나 노골적인 이방 종교 행위는 산당을 중심으로 계속됐다.

구약성서에서의 예배 공가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예배처소가 됐던 장소는 세겜, 실로, 예루살렘 등이 대표적인 예배 공간이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예배 공간이 있었으며, 예배 처소는 제한돼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배 공간의 구분과 지시는 이방 종교와의 혼합이나 우상숭배로 인한 종교의 타락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기에 한 분 하나님께 한 장소에서 예배드리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시대에 예배 공간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배 공간에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신약 시대에도 구약시대의 성전은 존재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이후 신약성서에서 예배 공간의 의미는 구약성서 시대와 전혀 다르다.

예수의 ‘성전사건’은 예배 공간의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예수의 성전사건이 의도한 것은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지속될 성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친히 성전이 되실 예수 자신을 미리 선언하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이상 건축물로서 성전이 구약시대처럼 의가 없다는 것이며, 신약시대에 건축물로서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바울은 고린도서신에서 구약성서의 성전 개념을 급진적으로 변경한다(고전 3:16~17). 바울은 구약시대의 건축물로서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교훈한다(고후 6:16 엡 2:21).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는다. 신약시대에는 건축물로서의 교회당이 아닌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장소 및 지역의 교회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은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언급한 “성전을 더럽히면”(고전 3:17)은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 개개인의 윤리적인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신자들의 일상의 삶이 윤리, 도덕적으로 파괴될 때,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거나 더렵혀지는 것을 암시한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몸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신약시대의 교회건축물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거룩한 공간도 아니다. 교회 건축물로서의 예배당은 단순히 예배와 교인들의 모임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기능을 가졌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회 건축물로서 예배당을 지으면서 성전 건축이라고 신자들에게 공지하거나 마치 구약시대의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처럼 성전 건축을 위한 헌물을 바치도록 독려하는 행위는 신자들을 호도하는 속임수일 뿐이다.

# 성서에서 가르치는 예배

예배 공간과 함께 예배의 의미를 고려할 때, 요한복음 4:19~26(예수와 사마리라 여인의 대화)의 단락은 매우 적절한 교훈을 제시한다.

예배 공간에 관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예배 공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시대에 예배 공간이 중요한 문제였다면 신약시대에 예배 공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는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라는 의미가 있다. 인간이 만든 예배 순서와 다른 모든 형식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한 보조적 역할만 할 뿐이다.

둘째, 영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는 예배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예배는 아무 의미 없는 인간의 공허한 모임일 뿐이다.

바울은 예배드리는 삶을 이야기 한다(롬 12:1~2).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의식으로서 드리는 예배 행위보다도 삶 속에서 드려지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삶이 없으면 형식적인 예배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예배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배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일상생활은 예배의 장소이며 예배의 행위일 수 있다.

결국, 참된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공간보다 중요한 것이며,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생각과 믿음, 그리고 예배를 받으시는 영이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

예배가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 의식으로 나타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만일 종교 행위로서의 삶이 예배당 안에서만 나타난다면 그것은 가식일 수 있고, 포장된 욕망일 수 있다.

예배는 경건의 표상이 아니라 가장 초보적인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자칫 예배가 형식적으로 흘러갈 때, 예배 공간에서 드려지는 순서와 행위로 끝날 때, 그것은 인간의 포장된 탐욕일 수 있다.

예배 공간도 예배를 위한 공간이라고 건축하지만 자칫 인간의 욕망이 교묘하게 포장된 집단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신학 없이는 개신교의 예배가 인간이 만든 그럴듯한 건축물 안에서 무속 종교의 의식으로 전락하기 쉽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피상적으로 될 수 있고, 인간의 욕망을 종교의식으로 포장해 드러나는 경건일 수 있다.

물론 참된 예배를 위해 예배 공간도 적절히 건축되어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믿음은 예배에서 예배 공간보다 중요한 요소다.

<성전 교회론의 실천적 함의>
권연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


   
▲ 권연경 교수
이스라엘의 영성에서 성전은 가장 핵심적인 장소 중의 하나다. 성전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상징 중 하나였다.

성전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됐다. 성전은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체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아로 고백된 예수가 성전의 역할을 대신한다.

# 이스라엘의 ‘성전숭배’에 대한 초대 교회 비판

예수를, 또한 그에게 속한 교회를 새언약의 성전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기존의 성전, 곧 예루살렘에서 ‘성업 중’이었던, 헤롯대왕에 의해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재건 중이던 성전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참된 성전을 발견하고, 성령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참된 임재를 경험한 공동체로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 혹은 집착이 영적 현실성을 상실한 집착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성전으로 깨달은 이후에는 성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을 통찰하기는 더욱 수월했다.

스데반의 자기변호는 성전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행 7장). 성전에 대한 집착을 스데반은 우상숭배적 욕망과 연결시킨다.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신앙이 지상적, 인간적 매개물을 내세운 외형적, 위선적 영성으로 타락해 간 현실에 대한 선지자적 비판을 계승한 것이다.

스데반의 비판은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실체적 성전을 무시한 채,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구약적 모형’, 혹은 ‘그림자’로 회귀하는 현대 교회의 움직임이 왜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런 우상숭배적 경향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결정적인 복음적 통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치명적인 이단사설에 해당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욕망의 지시에 따를 때, 우리는 영성의 외형에 집착한다. 스데반의 설교는 ‘성전’에 관한 우리의 위험한 행보를 우상숭배와 세속적 욕망의 휘둘림이라는 영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가르친다.

# 외부인이 아닌 하나님의 ‘식구’로서의 성전

예수 안에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를 경험한다. 따라서 ‘성전’은 교회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이미지의 하나였다.

새로운 정체성의 상징으로서의 성전 개념은 교회가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 다민족적, 다문화적 공동체로 변화되고 확장되면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방인 선교에 주력하며 이방인들의 교회를 세우고, 섬겨야 했던 바울에게 이런 문제는 더욱 현실적인 과제가 됐다. 사도 바울의 책임 중 하나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이방인들 역시,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 신자들의 의식 속에 이와 같은 새로운 정체성을 선명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성전 개념을 활용했다. 그 사례 중 하나를 에베소서(2~3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정체성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초한 ‘구속적 재창조’ 행위 속에 담긴 새로운 삶의 뜻을 구현하는 삶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 또한 이방 성도들이 ‘살아 있는 돌’이신 예수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 함께 자라가는 성전:성전의 사회적, 교회론적 함의

바울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화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실질적 변화를 요구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이방 신자들의 영적 위상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성전이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한다. 이방 신자들도 유대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이들이다. 그리고 이 건물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 교회가 되고자 의도하는 건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구현하는 성전이다. 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혹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은 바로 이런 영적이고, 궁극적인 비전을 구현하는 실제적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서로 하나가 되어 성전으로 자라간다는 생각, 곧 사회적이고 교회론적 하나됨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전제라는 발상은 매우 급진적이다. 하지만 이는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급진적인 ‘성육신적 기독론’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본질적으로 ‘화해’ 혹은 ‘통일’의 역동이라면(엡 1:10, 16; 엡 4:5~6), 그리고 이 영적 화해가 공동체 내의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의 회해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적 열망 역시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향한 열심히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성전 교회론의 도덕적 함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영적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의도를 속에 품고 모이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교회는 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초월적 정체성이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일상적 경험의 파도에 휩쓸릴 위험에 노출돼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영적 정체를 분명하게 밝혀 줄 종교적 장치를 갖고 싶어 한다. 구약시대처럼 그 나름의 제의적 공간과 정확하게 규정된 제의적 의식을 확보함으로써 영적, 초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제의적 충동이 참된 영성의수단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자면, 그림자를 잡는다고 실체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실체의 반영일 때만 그 본연의 의미를 갖는다. 실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존재하는 그림자는 무의미한 조작 혹은 의도적 위선의 장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제의적 영성의 무의미함을, 혹은 그 의례적 영성의 위선적 경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로 드려지는 것이며, 바울은 그런 예배/제사가 우리의 몸, 곧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포한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예배의 자리이고, 또 예배인 것이다. 따라서 성전이 좁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성령이 존재하는 공동체의 삶 전반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가시적 성전이 없이 일상의 무대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전 혹은 제의/예배 공동체로서의 이런 영적 정체성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교회 공동체는 세속적 가치가 철저히 폐기처분되고, 그런 허망한 가치에 기초한 경쟁적 자랑이 어리석은 것으로 밝혀지는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존재해야 한다. 믿는 자들에게 참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신 그리스도가 유일한 가치로 간주되고 고백되는 공간, 헛던 가치들을 빌미로 한 경쟁과 자랑 대신 사랑의 섬김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삶의 자리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은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몸, 곧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됐다는 것,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됐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것, 곧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뿐이다.

결국 우리가 성전이라는 선언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거하시며 우리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가 되시리라는 약속,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자녀가 되리라는 약속을 집약하는 표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성전은 교회 개념의 모든 것은 아니다. 비판의 도구이기 이전에 성전 개념은 그 속에 보다 깊은 언약적 울림과 거기에 연유하는 영적, 도덕적 함의를 담고 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그 다양한 영광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성전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의 자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사람들의 하나됨을 강조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진리를 보다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꿈꾸시는 ‘내 집 마련’의 비전이 우리들 모두의 개인적, 공동체적 비전으로 체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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