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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지적장애인도 구원받는다 …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어”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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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연구(4)

 

 

세밀연 주최 ‘제10회 장애인신학 세미나’

총신대 정승원 교수, "하나님의 의 차별 없다"

 

2015년 5월 31일 기사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되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의 믿음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는 앞설 수 없다. 따라서 지적 장애인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지적 장애인을 구원받지 못하는 대상으로 결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세계밀알연합(총재:이재서 교수, 총신대)이 지난 5월 30일 오후 1시 총신대 종합관에서 개최한 ‘제10회 장애인신학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한 정승원 교수(총신대)의 주장이다.

‘지적장애인의 구원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발표한 정승원 교수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가르쳤던 구원의 과정은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 전파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다음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며 “하지만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적장애인과 영아는 그 구원의 과정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즉, 지적장애인은 복음을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믿는 것도 그 내용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구원의 과정이 유일한 구원의 과정이라면 지적장애인과 영아에게는 구원받을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이와 같은 주장은 소위 조직신학의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지적장애인의 구원 문제를 ‘신론’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지적장애인에게 어떤 기회도 주시지 않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즉, 지적장애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는 말씀과 모순이 된다는 것.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분명 지적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과 방법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간론’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정 교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 이는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적용된다”며 “상대적으로 지적장애인이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신체적으로 부족하고, 성숙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지적장애인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면 그를 ‘그 모양대로’ 창조된 식물들과 동물들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적장애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기독론’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려는 목적으로 인성을 지니셨다. 만약 이러한 목적에 예외가 되는 인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온전한 성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론’에서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는 말씀을 지적장애인에게 예외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 3:23)라는 말씀에서도 지적장애인은 예외가 될 수 없다. 지적장애인도 죄인이며, 또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차별없이 지적장애인에게도 적용된다.

 


‘교회론’에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정 교수는 “고전 12:22~23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지체즈들 가운데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있고, 덜 귀히 여기는 지체도 있다고 말씀한다”며 “만약 지적장애인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 지적장애인이라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가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분명 하나님은 영아와 지적장애인들도 구원에 이르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구원을 논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이어 “차별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는 지적장애인에게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 모든 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지적장애인도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결코 인간의 지적 동의나 이해를 조건으로 하는 믿음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특히 정 교수는 신명기 1장 39절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지적장애인의 구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이 영아들이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 선악을 분별하는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담고 있지는 않다”며 “같은 맥락으로 어떤 방법인지,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할 지적 능력이 없는 영아들인아 지적 장애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며 “그 ‘모든 자’라는 범주에 결코 지적 장애인이 제외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승원 교수는 ‘하나님의 주권’, ‘죄’, ‘믿음’이란 주제들을 지적장애인의 구원과 연결해 지적장애인의 구원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지적장애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 바 가장 지혜롭게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않게 예정해 놓으셨다”고 서술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며, 각 사람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그의 원대로 스스로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신학자들의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사실이다. 엡 1:11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 심리적 차원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러한 것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장애인의 지적 상태와 구원의 관계는 결정적 차원이 아닌 반응적 차원에서 논해야 한다. 그리고 반응적 차원은 구원을 무효화 시키거나 취소하는 차원이 아니며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일정하고 보편적인 모습을 기대할 필요가 없는 차원이다.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바울이 강하게 비판한 것은 소위 ‘행위’다. 행위의 반대는 ‘은혜’다. 은혜는 인간의 그 무엇에도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전적인 것으로부터 온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적 공로, 영적 공로, 행동적 공로 등이 구원에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다. 단지 지적으로 모자라지만 봐준다는 식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요소도 개입되면 은혜가 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은혜다. 지적 능력이 구원의 결정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적장애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더 확실하게 부각시킨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이 택하심을 받는데, 즉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능력 차이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구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지적장애인에 대한 구원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지적장애인과 다른 사람을 먼저 구분한 다음, 구원 문제를 다뤄서는 안된다. 지적 능력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임의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주권으로만 결정된다면 지적장애인의 구원도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결정된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 죄와 지적장애인

지적장애인이나 지적 문제가 없는 사람이나 죄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적장애인이라고 해서 죄성이나 죄책이 없고, 지적 장애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어떤 능력을 통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지적장애인은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적 장애가 없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죄 문제도, 구원 문제도 인간 개인의 능력 밖의 일이다.

지적장애인의 구원 문제는 일찍 죽은 유아의 구원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둘 다 지적 능력이 결여돼 있다는 차원에서 같이 다룰 필요가 있다.

아더 핑크는 “아이들의 구원은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아들에 의해 구속받고, 성령에 의해 중생된 자들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자들의 자녀들은 효과적 은혜의 수혜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 안에서 이미 효과적 은혜의 적용은 시작됐다. 또한 분별할 수 있는 나이 전에 죽은 아이들도 구원받았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지적 능력이 결여된 아이들의 구원은 비밀에 속한 것이라는 말은 복음을 들은 후,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과정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 능력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과 성령의 중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핑크와 카이퍼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에도 유아나 지적장애인이 제외될 수 없고 구원 받는 방법에도 제외될 수 없다.

비록 비밀에 속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도 비밀스러운 것이다. 어차피 인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따라 되기 때문이다.

 

 

# 믿음과 지적장애인

구원 혹은 칭의는 믿음으로 밀미암아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니라”(롬 3:22). 분명히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밀미암느니라”고 말씀한다. 말씀을 들으므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듣지 못하는 태아가 만약 태어나기 전에 어미 뱃속에서 죽는다면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과연 하나님의 공평하신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지적장애인에게 말씀을 듣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적장애인도 구원의 기회가 없이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태아나 영아, 지적장애인에게는 구원의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렇기 때문에 들음과 믿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또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태아, 영아, 지적장애인은 구원을 얻을 길이 차단됐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구절의 맥락을 면밀히 살펴보면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 쪽의 개인적 믿음이나 지적 동의 차원의 시인을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마서의 주제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인간의 공로나 능력)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로마서의 주제와 모순이 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지적 시인도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이 마치 인간의 동의에 의존하는 것처럼 주장한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또 경고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믿음에 의존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가지는 지적 동의나 심리적 확신 역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믿음은 구원의 결정적 요소라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동의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 개인에게 주신 것이며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지만 그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나 영아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은 개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신의 지적 동의와 심리적 확신이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우리 개인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주어진 믿음이 우리의 지력이나 의지력, 영력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능력과 동의 능력이 없는 지적 장애인에게 이러한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물론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에 우리 개인적 믿음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적장애인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흔히 생각하는 우리 개인의 지적 동의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그런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개인의 지적 동의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믿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위배된다. 오히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믿음은 지적 동의나 이해가 필요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이다. 이 믿음 역시 은혜다. 즉, 하나님께서 단동적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믿음이다. 우리의 지적 판단이나 이성적 판단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지적장애인에게도 믿음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할 성경적 근거는 없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공로, 즉 지적 능력, 도덕적 능력, 신앙적 능력, 의지적 능력 등의 인간 행위는 결코 개입되지 않는다. 개인적 차원의 믿음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앞설 수 없다.

 

 

심지어 복음에 대한 동의가 선택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거룩, 예배, 선행, 열심, 지성, 의지 등의 행위는 성령의 이끌리심에 따른 그의 백성들의 구원의 결과적 모습이지 조건적 모습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상태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구원의 필수 요건인 믿음은 개인의 지적 동의나 확신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 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지적장애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거룩, 예배, 선행, 열심, 지성 등은 구원의 결과적 모습이지 조건적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지적장애인에게 결여돼 있다고 그에게 구원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기뻐 받으신다. 오히려 장애가 없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구원의 결과적 모습들이 온전하지 못하고 일관적이지 않음을 볼 때, 지적장애인에게 그러한 결과적 모습이 없다는 사실을 큰 문제로 취급될 필요는 없다. 즉, 성도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모습이지만 지적정애인은 가질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는 △장애인 돌봄은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합류점(이상원 교수, 총신대) △소그룹 활동을 통한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 세우기(김한옥 교수, 서울신대) △창조신학에서 ‘몸’의 공존으로서 장애(인) 신학 제고(김흥현 목사, 그안에교회) △장애인신학의 해석학적 전환(박성철 박사, 교회와사회연구소 연구원) △함께 걸어가는 장애인신학(최대열 박사, 명성교회 부목사) 등의 연구논문도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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