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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교리와 신학

[원문] 웨슬리의 교회개혁과 성령의 역사

by 데오스앤로고스 201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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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일 기사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이 지난 5월 1일(2015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교회개혁과 성령’을 주제로 제23회 영성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이날 발표된 세 편의 연구논문을 주최 측의 제공으로 데오스앤로고스에서 원문으로 제공합니다. 자료에 대한 모든 법적 권리는 제공자 측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18세기 웨슬리의 교회개혁과 성령론:웨슬리의 교회개혁과 성령의 역사
/ 김영선 박사(협성대)

Ⅰ. 들어가는 말

존 웨슬리는 18세기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한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루터가 그 당시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잃고 타락하는 실상을 보면서 종교개혁 작업을 시도한 것과 같이 웨슬리도 그 당대의 교회가 정체성과 순수성을 상실하여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응시하면서 영국교회 개혁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작업은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신성클럽(Holy Club)의 조직과 더불어 메소디스트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웨슬리는 교회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였다. 웨슬리는 교회를 개혁하는 사명이 메소디스트(methodist society)에게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의 운동은 “어떤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교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에는 개혁적 사상이 많이 나타나 있다. 필자는 웨슬리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교회의 개혁과 성령의 역사를 고찰하여 우리의 목회와 영성에 새로운 자극과 에너지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Ⅱ. 교회에 대한 이해

웨슬리는 성화의 교리를 하나님이 감리교인에게 부여하신 교리로 믿었다. 웨슬리는 교회를 성화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는 교회를 신조나 교리위에 구축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화되어 가는 자들의 사랑의 교제, 사랑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교회는 본질상 거룩하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이 즉 교회를 세우신 분이 거룩하고, 교회의 모든 제도가 성화를 추구하도록 계획되어 있으며 또한 주님께서 모든 교인들이 거룩하여 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웨슬리에게 성화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본성이 변화를 받아 거듭나서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은총이다. 즉 성화는 성령에 의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다.

 

 

웨슬리는 교회란 성령이 충만한 그리고 성령으로 굳게 결합된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명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 인도하는 주체는 살아계신 성령이라고 하였다. 스타키(L.M. Starkey)에 의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교회의 주요한 표식은 멤버들의 성결한 생활이며 그 근원은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역사가 없다면 교회는 존립할 수가 없다. 교회의 본질은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성령의 임재없는 설교는 공허한 말이고, 성령이 떠난 교직제도는 거짓된 것이고, 성령이 떠난 예배는 미신화되고, 성령이 없는 교회는 의미가 없다. 웨슬리는 만약 교회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않는다면 비록 사도적 전통, 정통적 신조를 이야기한다 해도 그 교회는 가짜교회라고 보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생활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내적, 영적 측면에 근본을 두고 있지 신조, 성례전이나 교회 정치 등 친교를 형성하는 외적 요소에 있지 않다. 성서, 세례, 성만찬 등은 교회의 은혜의 수단에 속한다. 우리는 이런 교회의 은혜의 수단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능력과 수단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에 의한 설교는 무익한 것이 된다. 따라서 교직과 설교의 직무도 사도 계승적인 교직제도에 의존하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되어야 한다.

Ⅲ. 교회의 교직제도

웨슬리는 교회를 어떤 형태와 조직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활동과 기능과 사명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웨슬리는 교회의 법과 제도, 전통을 존중하였으나 그것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전도에 지장을 줄 때 과감히 제도와 규율을 뛰어 넘었다. 웨슬리는 교회제도에 대하여 상대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1745년까지의 웨슬리는 감독, 사제, 집사의 직제와, 예전을 유효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감독에 의한 안수례의 필요성을 주장한 고교회주의자였다.

그러나 1746년 1월 20일에 웨슬리가 피터 킹(Lord Peter King)의 저서『원시교회의 제도, 훈련, 일치, 예배』를 통해 감독(Bishop)과 장로(Presbyter)는 초대교회에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따라서 사제(장로)는 감독과 마찬가지로 안수례를 집행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웨슬리로 하여금 감독의 안수와 마찬가지로 장로의 안수도 똑같이 유효한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콕(Thomas Coke, 1737-1814)과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를 북미의 감독자(Superintendent)로 임명 파송하였고, 와트코트(Richard Whatcoat)와 베시(Thomas Vasey)에게 장로직을 주어 세례와 성찬식을 집행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직제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웨슬리는 교직 자체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직제도를 만든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직제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례전도(안수례도 포함하여) 교직자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상황이지만 이것도 사실은 교회 전체의 결정에 위임되어 있는 일로 보아서 목사만이 안수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절대적이라기보다는 교직자만이 예전을 집행하는 편이 교회 전체를 위해서 유익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배경으로 하여 이행되어져야 한다는 노로요시오의 견해가 대단히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충분한 신학적 작업 없이 성례전은 원리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보아서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안수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웨슬리도 안수는 감독이나 그와 같은 권한을 가진 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제도에 대한 웨슬리의 개혁은 평신도 설교자 임명, 옥외설교 시도, 소그룹 제도 시행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들을 임명하여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그 당시 교회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시도였다. 평신도 설교자들은 그들이 속한 신도회나 또는 다른 신도회를 인도하는 구역 설교자들(Local Preachers)과 웨슬리의 임명을 받아 신도회를 순회하는 순회 설교자들(Circuit Preachers)로 구분되었다. 웨슬리 목회사역에서 평신도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평신도들의 간증과 정직한 말은 그들의 산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안수 받은 사람의 말보다 더 호소력이 있었다. 물론 평신도는 성서적, 신학적 전문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비주의와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들이 극단주의를 피하고 건전한 상식을 중시하고 성경의 한 구절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피하기 위하여 성경전체(the whole tenor of Scripture)를 통해 해석하도록 가르쳤다. 평신도 설교자들은 진정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자들로서 사제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또한 성례 집행권을 가진 사제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평신도 설교자가 예전을 집행할 필요가 없다는 웨슬리의 신념이 무너졌다. 그렇게 된 까닭은 첫째로, 대다수 국교회 교직자들이 의도적으로 메소디스트의 수찬을 거부하였고, 둘째는 메소디스트들은 자신들의 설교자들이 그들의 예전을 집행해주기를 원하였고, 셋째는 스코틀랜드(Scotland)와 아메리카의 전도자를 위하여 안수례를 집행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84년 9월 1일과 2일에 아메리카 합중국이 독립하게 되자 약간의 평신도 전도자에게 안수하여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웨슬리는 옥외에서 설교하였다. 옥외 설교는 그 당시의 교회의 기본 구조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옥외 설교를 감행하였다. 옥외 설교는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당시 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많은 대중을 만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웨슬리로 하여금 남루한 옷과 때 묻은 몸으로 예배 장소에 감히 찾아 올 수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만나게 하였다. 웨슬리는 1739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약 500회 설교하였는데 교회에서 한 것은 불과 8회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웨슬리가 옥외 설교의 가치와 효력을 크게 인정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의 효과와 편리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였다. 옥외 설교라는 비전통적인 방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웨슬리는 그것에 대하여 변호하였다. 그는 1772년 9월 6일자 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날까지 야외 설교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명을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이것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I preached on the quay, at Kingswood, and near King Square. To this day, field preaching is a cross to me. But I know my commission and see no other way of 'preaching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Ⅳ. 사회개혁에 앞장서는 교회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이며,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복음을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의 구원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웨슬리는 교회가 복음만 설교할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등 사회적 제반 문제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메소디스트 교인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웨슬리에게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되고,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로 나아간다. 웨슬리의 일차적 관심은 영혼의 구원(개인의 성결)에 두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 구원(사회적 성결)으로 나아가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사회구원과 사회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복음 운동은 무의미하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이야말로 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삶의 개혁이 메소디스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메소디스트회는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염려하였다. 웨슬리 신학 속에는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 보자는 사회적 개혁주의 사상(social reformism)이 내포되어 있다.

 

 

웨슬리는 사회의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활동들을 통해 사회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다.

1.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감리교인들로 하여금 모금 운동을 하게 하였다. 모금된 금액은 세심한 논의를 거쳐 필요한 이들에게 배분되었다. 감리교회는 가난하고 재난을 만난 사람들을 책임지고 돕는 것을 그들의 중요한 선교 사업으로 생각하였고,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감리교인들에게 내린 특별한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2. 웨슬리는 대여금고(lending stock)를 설립하여 가난한 자들과 형편이 어려운 자들에게 무이자로 빌려주어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가는 것을 막고, 또한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을 막았다.

3.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웨슬리는 런던에 “구빈원”(The Poor House)을 세워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았는데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1766년에는 “과부의 집”을 세워 전쟁 미망인을 위한 과부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들만이 아니라 혼자된 남자 노인들을 돌보는 “노인들을 위한 감리교 집”(Methodist House for the Aged),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숙소와 식사를 겸한 안식처인 “나그네 동무회”(The Strangers' Friendly Society)를 설립하였다.

4. 웨슬리는 신도회를 통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현금, 의복, 생활필수품, 연탄은 물론 의약품도 나누어주었다. 또한 의사, 약제사, 약국의 협조를 얻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의료팀을 조직하여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브리스톨 광산촌에서 무상으로 약을 주었다. 무상 의료활동은 영국 역사상 웨슬리가 처음으로 실천한 운동이었다.

5. 웨슬리는 재소자를 위한 활동과 교도소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리는 여러 신문과 단행본을 통하여 지옥과 같이 어둡고, 불결한 교도소들의 환경을 개선할 것을 촉구했고, 교도소의 생활이 오히려 범죄를 배우는 생활이 되고 있음을 경고하였으며, 긴 재판과정과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에 대한 불공평한 재판처리에 항의하였다. 웨슬리에 의해서 촉발된 교도소 방문은 1743년에 감리교회의 규칙이 되었고, 1778년 연회에서 교도소에서의 봉사활동은 모든 감리교 설교자들의 의무로 규정되었다.

6. 웨슬리 당시의 공공학교는 오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만 다닐 수 있었다. 가난한 자들은 교육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1739년 킹스우드에 광부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같은 해 런던에도 학교를 세웠다. 웨슬리의 교육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와 국가에 쓰임받는 사람을 양육하는데 있었다.

7. 18세기의 사회적 문제들 가운데 노예문제가 최악의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영국 정부는 노예 사업의 보호와 발전을 도모하였으며 영국 국교회도 노예매매제도를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박해와 학대 또는 폭행의 부당성을 과감하게 주장하고 1770년부터 노예 제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웨슬리는 식민지에서 가족들이 헤어지고 팔려가는 노예시장의 야만적 행위를 목도하고 노예제도를 “모든 악랄한 것의 저주스러운 총체”로 규정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다. 웨슬리는 노예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입장 표명이나 또는 노예해방을 위한 기도와 금식을 요구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참여하여 국회에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관철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감리교 연회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서명운동과 국회청원운동을 하였다.

웨슬리는 이외에도 여권신장(女權伸張), 전쟁의 추방, 투표권 포기 금지 등은 물론 사회개선책의 하나로 1742년에 관습개혁 협회(Society for Reformation of Manners)를 조직하였다.

 

 

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교회와 사회 개혁

웨슬리는 그의 회심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령과 동행한 성령의 사도였다.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을 소생시키고, 그의 목표를 재설정하도록 한 것은 성령의 역사였으며, 웨슬리의 교회 개혁을 위한 모든 활동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했다면 웨슬리의 개혁 작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웨슬리의 교회와 사회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와 사회 개혁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성령은 창조 이전부터 역사하여, 예언자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마리아에게도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시고, 구세주의 활동에 독특한 방법으로 임재하였으나 오순절 이전까지는 성령은 성결케하는 영으로 온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오직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율법시대에 가능하지 못했던 성결의 영이 주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성령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의 가장 궁극적이며 결정적인 표식은 성령의 열매를 가지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는 그 열매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령의 증거없는 성령의 열매란 있을 수 없으며, 역으로 성령의 열매 없는 성령의 증거도 있을 수 없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사실을 믿기 위하여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성령을 받는 것이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믿음과 평화와 기쁨, 그리고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요한복음 3:1-18의 주해를 통해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 자신도 회심 체험 이전에는 아들의 신앙(복음적 신앙)이 아니라 종의 신앙(율법적 신앙)을 가졌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을 체험한 후에 온전한 신앙관을 정립하였고, 하나님의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으며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웨슬리는 성령의 역사가 보편적임을 말한다. 성령의 역사는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성령의 역사는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진지하게 살고 있는 현장에서 나타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자유로운 것이다. 성령은 교회 밖에서도, 다른 종교 안에서도 역사하신다. 성령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활동할 수 있으며, 이교도들도 이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응답 여하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영원 전부터 선택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이 보편적으로 미리 예비적으로 모든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에 응답할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성령의 역사는 결코 인간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설득하고 종용한다는 것을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이 웨슬리의 입장이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오성, 감정, 의지를 포함한 인간의 인격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올바르게 지도하여 비이성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웨슬리는 이성의 활동을 존중한다. 그러나 구원의 궁극적 주도권과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Ⅵ. 웨슬리 집회를 통한 성령의 역사

1. 바닥에 쓰러짐

웨슬리의 집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은 회중들이 바닥에 쓰러지는(sunk down to the ground)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획일적이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 속에서 쓰러지기도 하고, 맥없이 죽은 듯이 쓰러지기도 하고, 시간의 간격을 두고 쓰러지는 등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웨슬리는 이 현상을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하였다.

2. 육체적, 영적 고통에서 치유 받음

웨슬리의 집회 현장에서 정신이상 증세로부터 고통받는 사람은 물론 영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도 웨슬리와 그의 동역자들이 함께 기도할 때 고침을 받았다. 특히 주목할 사항은 평소에 멀쩡한 사람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갑자기 울거나 몸을 떨거나 탄식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얼마 안 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와 능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웨슬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변화됨

웨슬리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웨슬리의 옥외집회를 비롯하여 그의 복음전도를 반대하고 방해하였다. 특히 웨슬리의 집회시 일어나는 영적현상에 거부감을 가지고 그것을 사기 또는 기만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웨슬리는 반대자들을 집회현장에 참여시켜 영적현상이 술수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웨슬리의 영적현상이 사기나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의사, 퀘이커 교도, 등의 사람들이 웨슬리가 기도했을 때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었다.

4. 불신자들이 구원받음

웨슬리의 집회에서 불신자들(무신론자, 교도소의 죄수들, 폭도와 술주정뱅이)의 구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울거나, 몸을 떨거나, 탄식하거나, 크게 소리 지르거나, 가슴을 쳤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항상 기쁨과 평화 속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5. 귀신들린 사람들이 구원받음

복음전도운동 과정에서 웨슬리는 때때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다. 웨슬리는 기도함으로써 악한 영들을 쫒아냈다. 웨슬리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질병들 가운데 악한 영들이 의한 것들이 있음을 알았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치유 가능하다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귀신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귀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역시 성서적인 자세는 아니다.

 

 

Ⅶ. 나가는 말

웨슬리는 복음의 전 과정이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로 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임을 역설했다. 웨슬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했다.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다양한 영적 현상들을 웨슬리가 중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리를 이성적으로 승인한다 해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것을 마음으로 믿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복음운동은 성령론적 복음운동이라 힐 수 있다.

웨슬리는 영적현상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베푸시는 은혜로 보았다. 그렇다고 모든 영적현상들을 성령의 선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웨슬리는 사탄도 얼마든지 성령의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현상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분별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웨슬리는 하나님께서는 영적현상 없이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를 경계했다. 그것은 영적현상을 부정하는 것과 영적현상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사실들이 있다. 하나님은 예전처럼 지금도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웨슬리를 영국의 교회와 사회의 개혁자로서 있게 한 성령은 지금도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웨슬리의 복음운동은 그의 회심체험에 근거하여 성령에 의한 내적 변화와 생활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영적 능력의 상실로 비인간화의 길을 가는 우리 시대에 성령의 내주의 역사를 체험한 웨슬리의 성령신학을 재발견하는 작업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 새로운 개혁과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이웃과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냉소적, 비판적, 부정적,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교회가 개혁의 길을 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웨슬리 신학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개혁은 원한다고 해서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혁(Refomation)에는 언제나 저항(Protest)이 따라 다닌다. 개혁에는 개혁을 거부하는 기득권자들의 강력한 반발이 존재한다.

범교단적으로 개혁의 열망과 중지를 모아 교회의 모든 비리의 요소를 근절하고, 제도와 행정을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웨슬리의 성화신학에서 이런 교회 개혁의 한 패러다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웨슬리의 성화신학의 실천적 면을 새롭게 조명한다면 한국교회의 자기 변혁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내용의 원활한 게재를 위해 각주 및 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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